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어린이였던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오랫동안 ‘어린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이를 얼른 ‘졸업’하고 싶었지만, 유치원을 졸업하거나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과는 다르게 어린이를 졸업하는 건 명확한 마침점이 없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이제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어린애 취급’ 했다. 아이였던 시절에 나는 내가 아이인 것이 싫었고, 내 주변의 아이들도 싫어했고(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제외하고), 나보다 어린아이들은 더더욱 싫어했었다(‘너보다 어리니까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양보하라’는 말 때문에).
스스로가 아이인 게 싫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제약이 많다는 점이었다. 혼자 어딘가에 가려면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혼자 혹은 친구들과 놀러 멀리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떤 놀이기구는 친구들은 다 타도, 나만 키가 작아 탈 수 없었던 적도 있다. 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하면 주변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만큼 더 해야 할 일이 많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언젠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일기장에 적은 적이 있다.
’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고 가고 싶은 곳을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나는 아이였던 시절을 결코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일종의 다짐처럼 그런 태도를 간직하며 자라난 어른이 되었고, 정말로 누군가가 다시 아이가 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사절할 것이다. 더구나 ‘노키즈존’이라는 용어까지 있는 요즘 시대에 다시 아이가 된다면 더 많은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늘 키가 작은 편이었던 나는 동년배들에 비해 느끼는 행동의 제약이 더 많았다. 친구와 함께 어딘가엘 놀러 가면 주변 어른들로부터 ’네가 동생이니?‘하는 소리를 들었다. 멀리 있는 것을 봐야 할 때, 나보다 앞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머리에 시야가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거나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야 할 때, 남들은 그냥 꺼내도 될 것을 나는 무언가 발을 딛고 설 받침대를 구해 올라가서 꺼내야 한다거나. 키가 작다는 이유로 늘 선생님 눈에 잘 띄는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거나 조회 시간에도 차렷 자세를 절대 풀지 못하는 제일 앞에 부동자세로 서있어야 하는 일들. 맨 뒤에 선생님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곳에서 자유로운 자세로 서있는 키 큰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작은 체구에 잇따르는 불편함 들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으로 쌓이기도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나에게 ’ 애기‘라고 불렀던 적도 있다. 내가 4학년이던 2001년은 이제 막 편지가 이메일로 대체되던 시기였는데, 그 당시에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우리 반의 아이들에게 ’ 나를 애기라고 부르지 말라 ‘는 장문의 진지한 이메일을 써서 단체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다음날 바로 그것조차 놀림거리가 되어 돌아오는 바람에 흑역사를 하나 더 생성한 꼴이 되고야 말았지만. 또, 아이들은 나와 같은 나이이면서도 내게 ‘귀엽다’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화가 났고, 내게 귀엽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될 정도로 무척 못 견뎌했다. 지금은 ‘귀엽다’는 말을 듣는 걸 싫어했던 나를 이해한다. 어린이였던 내게 ‘귀엽다’는 말은 그저 ‘어린이 취급’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초경도 또래 친구들에 비해 늦어서, 내게는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어린이 취급을 받는 기간이 길었던 것 같다. (초경을 하면, 여자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듣는다. ‘너는 이제 아이에서 여자가 된 거야.’ 나는 원래부터 심정적으로는 여자였음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초경 이전의 기간은 ‘어린이’였던 기간이 된다.) 온전히 어린이를 벗어난 나는 이제 드디어 ‘귀엽다’는 말을 외모에 대한 나름의 칭찬으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실은 그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더구나 내가 그저 신체적으로 ‘작다 ‘는 이유만으로 나를 동생 취급하던 동년배들을 오래도록 싫어했다. 그러는 나도 물론 나름의 의미에서 유치한 아이이기도 했으나, 보란 듯이 괜히 더 두꺼운 책, 어려운 책을 일부러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 나는 이런 소설책, 어려운 책을 읽는 아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어 했다. 때로 그 전략은 성공하기도 했다. ’ 생각이 깊은 아이, 책을 많이 읽는 아이, 진지한, 어른스러운 아이‘ 같은 평을 받을 때마다 나는 기뻐했다.
156센티미터에서 성장이 멈춘 나는 어엿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주 덜 자란 취급을 받았다. 20대 때는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오해받을 때가 허다했고(중고등학생 때는 초등학생으로 많이 오해받았다), 30대인 지금은 그나마 20대로 취급받을 때가 많으나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 학생‘ 으로 부르며, 특히나 어리숙한 이들을 노리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절대 자랑이 아닌데, 서른셋이 된 최근까지도 편의점에서 술을 살 때 민증 검사를 받았다. 신분증을 미처 안 갖고 나왔을 때 도로 냉장고에 맥주를 다시 넣고 나온 적도 더러 있다. 그런 일은 이제 나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다.
어려 보이는 것의 사회적 불편함을 말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너무도 싫다. 무조건 ’ 어려 보이면 좋은 거 아니냐 ‘는 둥, ’ 배부른 소리 한다’는 둥.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어려 보이면 곧 만만해 보이고 함부로 불리고,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피력했을 때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래’라는 식으로 신뢰롭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내 경험 자체가 더 가벼운 것으로 매도되는 일을 평생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닐까.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지 않은 나이, 서른셋이 되었음에도 ‘어려 보임’의 이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아직까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제 나이로 보이고 싶거나 오히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를, 성숙한 사람으로 보이길 늘 바랐었다.
그래서 아이를 그저 귀엽다고 대상화하는 콘텐츠들을 경계한다. 아이의 ‘귀여움’만을 소비하는 각종 육아 예능이라든가, 아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촬영한 각종 영상들을 보고, 아이의 입장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어린이는 자신을 어린이로만 대하는 시선을 싫어하기에, 어떤 ‘한 개인의 특성’을 ’ 아이니까 ‘라고 퉁쳐서 보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아이니까’ 그래야 한다거나, 그럴 수 없다거나 누군가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말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웃 어른으로서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이였을 때 가장 싫어한 사람들의 태도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런 ’ 아이를 아이로만 보는 시선‘ 때문에 내가 스스로 아이인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아이로서의 나 자신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아이를 보면, 귀엽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 너라는 사람과 만나서 참, 기쁘다. 참 좋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