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2020
멀리서 보면 아득히 아름답다. 특히 남의 인생은..
건조하게 읊조려보면 근사하다. 내 인생도 그럭저럭..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봄 햇살에 가슴 설레 나선 발걸음을 황사와 꽃샘추위가 다리 걸어 넘어뜨리듯 인생도 그러하다. 꽃길만 걷고 싶은 그 마음, 바람과 다르게 현실은 구비구비 펼쳐진 궂은 길이 상당하다.
거친 돌뿌리에 채여 엎어진 그 마음과 화해하지 못한 주인공의 고민과 갈등을 담담하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나만 엎어지진 않음을.. 엎어져서 몸을 돌리면 그 또한 편할 수 있음을..
대온실수리보고서에 이어 김금희 작가의 작품을 다시 만났다.
개천에서 용난 이름도 영롱한 이영초롱 판사가 어린 시절 귀양살이처럼 잠시 살았던 제주로 다시 발령받아 내려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원치않는 제주행으로 초토화된 어린 마음에 큰 의지가 되었던 친구 고복자.
사실 복자와의 과거사가 어마어마하다거나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반전이 있다거나 하진 않다.
대온실수리보고서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김금희 작가는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력이 남다르다. 누구나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이다. 질투, 죄책감, 허무, 그리움.. 누구라도 겪는 이런 뻔한 감정들을 뻔하지 않는 표현으로 낮고 깊게 전달하는 매력적인 문장들을 잘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번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1_ 내가 과거 이야기를 잘 하지 않고 딱히 그리운 시절도 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건 다 잊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무거워서 어딘가에 놓고 왔을 뿐이었다.
너한테 과거란 냅킨 같은 건가봐. 뭘 그렇게 잘 잊고 잘 버려, 했던 윤호의 말처럼.
하지만 그건 걔의 오해였다. 내가 과거 이야기를 잘 하지 않고 딱히 그리운 시절도 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건 다 잊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무거워서 어딘가에 놓고 왔을 뿐이었다. 어느 계절의 시간 속에, 기억 어딘가에 넣어놓고 열어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오늘처럼 잠들 수가 없을 때면 밀려왔다. 모든 것들이.(p57)
기억이 무겁다.. 가슴을 억누르는 무거운 기억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주어진 하루하루를 또 살아내야 하기에 그런 기억들의 파장에 온 몸을 떨고 있을 수 만은 없다. 그래서 꼭꼭 감춰두며 외면한다. 그리운 사람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 내가 상처준 사람들.. 내 마음에 진한 흉터가 된 기억들.. 그런 기억들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2_내 마음을 광폭하게 흔들곤 했다. 바람이 부는 날 자전거를 타고 고고리섬을 누비면 불어닥치던 그 양뺨을 갈기는 듯한 칼바람처럼.
나는 종종 고모가 그리웠지만 고고리에서의 일들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일종의 죄책감으로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쩌면 고모에게는 그 일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나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대 내내 고고리에서의 일들은 내 마음을 광폭하게 흔들곤 했다. 바람이 부는 날 자전거를 타고 고고리섬을 누비면 불어닥치던 그 양뺨을 갈기는 듯한 칼바람처럼.(p66)
나는 김금희 작가의 이런 표현이 참 좋다. 유리잔처럼 투명하고 예민하던 10대 시절의 일들은 맑은 잔에 남긴 지문처럼 선명하다. 그 시절의 일들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한바탕 감정의 회오리를 만드는 일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3_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복자네는 꾸준히 개를 키웠고 복자는 으레 눈썹을 그려주었다. 대체 왜 개에게 그렇게 하는 거야? 물으면 우리 제순이는 특별하니까, 라고 대답했다. 복자는 그런 제순이의 눈썹이 일종의 농담 같은 거라고 했다. 그리고 농담은 우리에게 일종의 양말 같은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하루가 활기차다고도 했다.(p80-81)
신세 한탄이 절로 나오는 비관적인 하루에도 눈물보다는 오히려 되도 않는 농담이 나온다. 이래서 내가 그랬었나부다. 우리의 보잘것없고 시시한 날들을 감추고 보온하는 포슬포슬한 것. 맞아. 농담은 이런 거였어.
#4_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른이란 사실 자기 무게도 견디기가 어려워 곧잘 무너져내리고 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른이란 사실 자기 무게도 견디기가 어려워 곧잘 무너져내리고 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1999년 내가 복자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복자는 그걸 잘 알고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속일 수 있기를 바라는 힘으로 어른이 되는 아이들이.(p143)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였던 복자. 자신은 섬이 아닌 서울에서 살 거라며 라디오를 들으며 열심히 표준어를 연습하던 복자. 부모님의 이혼으로 해녀인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단촐한 살림 속에서도 농담의 여유를 알고 있던 복자. 그래서 영초롱은 복자에게 이끌리듯 친구가 되었던 거 같다. 어찌할 바를 모
르겠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받아쳐야 하는지.. 복자는 스스로 보여준 듯 하다.
#5_불행의 표피가 너무 단단해서 말이 그 안을 드러낼 수 없을 듯한 부분은 복자의 것이면 안 될 것 같았고
인터뷰를 하는 간호사가 복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부분은 복자인 듯했고 어느 부분은 복자가 전혀 아닌 듯 했다. 불행의 표피가 너무 단단해서 말이 그 안을 드러낼 수 없을 듯한 부분은 복자의 것이면 안 될것 같았고, 유채꽃처럼 이쁘잖아요 할 때는 당연히 고고리섬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복자일 듯 했다.(p130)
어린 시절 안 좋게 헤어진 복자가 간호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초롱. 뉴스 속 익명처리된 간호사의 인터뷰를 들으며 복자를 떠올린다. 어렴풋이 복자의 어린 모습만 기억하는 영초롱은 인터뷰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인터뷰 내용이 친구로서 듣기 속상한 내용일 때는 복자가 아닐 거라고, 한편 유채꽃 이야기를 하며 웃는 부분에서는 복자일 듯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복자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친구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불행의 표피가 너무 단단해서 말이 그 안을 드러낼 수 없을 듯한 부분은 복자의 것이면 안 될 것 같다.' 어렵게 씌여진 문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난 오히려 영초롱의 진심을 잘 표현해준 거 같아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6_ 나는 그냥 네 얘기를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까워.
"그렇지. 너무하지. 근데 사람이 때론 그렇게까지 한다. 아등바등을 넘어서 악착같이. 근데 이판사, 엄마는 어디 나가서 이거 팔면서 우리 딸 판사라고 안 해. 이미 알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절대 말 안 해."
나는 엄마가 내 신분을 밝히는 일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말하자 그건 또 왜 그런지 궁금해졌다. 혹시 무슨 청탁이라도 할까봐 그런가. 딸 월급이 얼마이기에 이런 일을 하냐고 한소리 들을까봐 그런가. 엄마는 엄마 일이 떳떳하지 않은가. 별생각이 오갔는데 엄마는 그냥 아까워서, 라고 얼버무렸다.
"나는 그냥 네 얘기를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까워."(p147)
갑분싸 문장. 어린 자식에게 힘든 시간을 안겨준 무능력한 부모라고만 생각했는데. 영초롱 엄마의 이 한 문장이 캐릭터를 살렸다. 성공한 자식이 너무나 대견하고 고마워 아무데서나 자랑하기도 아까운 그런 마음. 나도 이런 마음을 갖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7_ 누군가를 아프게 떠올리면서도 좋은 기억들도 잊히진 않아 어쩔 수 없이 슬픔과 기쁨 사이에 걸려 있는 내 마음 같다
언젠가 나뭇가지에 걸린 방패연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다 찢기고 나서도 여전히 바람이 불면 그것을 타고 하늘하늘거리면서 오색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장면이 생각났다. 중학교 어느 하굣길에서 나는 그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떠올리면서도 좋은 기억들도 잊히진 않아 어쩔 수 없이 슬픔과 기쁨 사이에 걸려 있는 내 마음 같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p220~221)
하늘을 멋지게 날고 있어야 할 방패연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날아갈 듯 날아가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 그 자리를 선회하면서도 화려한 오방색을 뽐내는 모습으로 작가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어지러운 감정을 표현한다. 나는 김금희 작가가 독자에게 선물처럼 주는 이런 표현이 참 좋다.
책 초반 이 두 파트를 읽으며 완전 넉다운이 된 기분이었다.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초장부터 장난질이냐!'라는 말이 절로 나오듯 독자의 가슴을 이리 쥐고 흔들어 버리면 어쩌란 말이냐!
김금희 작가가 날리는 원투 펀치에 두 손을 다 들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영초롱은 제주 고모네로, 영웅이는 서울 큰아버지네로 가족들은 뿔뿔이 흝어졌다.
그 상황을, 그 감정을, 그 아픔을 구구절절한 사연팔이가 아닌 이렇듯 덤덤한 대화와 자기고백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냥 거기 날씨는 어떠냐? 어른들이 공부 많이 시키냐?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는데, 전화를 끊을 때쯤 영웅이 "누나, 난 종일 한 번도 안 웃기 내기를 해"라고 했다. 평소에 습관처럼 히죽히죽거리던 녀석이라 나는 당황했다.
"누구랑?"
"나 자신이랑"
"왜?"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왜 웃으면 안 돼?"
영웅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면 정말 멍청한 사자같은 게 될까봐"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었던 세상 편으로, 이를테면 영웅이 사자가 되고 싶다며 더는 헤헤거릴 수 없는 세상. 우리의 대화는 잠시 끊겼다. 이윽고 영웅이 학원 갈 시간이 되었다며 작별인사를 하자고 했다.
"영웅아,"
"응."
"누나는 요즘 다섯시 이십분이면 여기 옥상에 올라가서 웃는 연습을 해."
영웅은 대답을 하지 않다가 나와 반대네, 라고 말했다.
"그래, 하하하하하하하 이렇게 깔끔하게 일곱 번씩 일곱 번 웃고 내려와. 일종의 웃음 단련이라는 건데 넌 모를 거다. 김태선 사범님이 나한테만 가르쳐줬으니까. 네가 안 웃겠다는 멍청이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까 알려주는 거야. 너 태권도 이년 배우고도 노란 띠밖에 못 땄지?"
"응."
"누나는 일 년 만에 빨간 띠까지 땄지?"
"겨루기에서 다 이겨서 그렇잖아."
"그게 왜 그렇겠어? 여기는 섬이라 우리 동네에 있던 용인대체육관 같은 건 없어. 그래서 사범님이 가르쳐준 비법으로 내가 다섯시 이십분만 되면 그 단련을 꼭 하고 내려와."
"거기 애들이랑 같이?"
"미쳤니? 비법인데 가르쳐주면 안 되지. 나만 써서 다 이겨야지."(p14~16)
복자는 내개 서울에서 왜 왔는지 직접 말하라고 했다. 그런 것까지 말해야하나? 여기가 성당의 고해소도 아니고 신부님도 없고 듣는 사람이라곤 이애, 복자뿐인데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
하지만 말해야 했다. 눈앞에서 평생 본 적이 없는 큰 파도가 이 미터쯤은 일었다가 밀어닥치고 포말들이 부서졌으며, 이미 엉망이 된 머리카락은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이 바람에 항복하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펄펄 뛰는 자연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은 전혀 다른 주파수로 움직이는 듯했다. 할망신은 당연히 있을 것 같았다. 작은 굴, 실타래, 물때가 낀 돌바닥,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과 모든 것들이 그런 분위기였다.
"우리집이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복자 쪽에서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일단 입을 열자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울에서 나쁘게 지냈습니다. 아빠 친구라고 해서 문을 열어줬는데 남자들이 신도 안 벗고 들어와서 욕설을 하였고 싸웠습니다. 아빠가 신발을 벗으라고 하자 남의 돈을 안 갚는 집은 사람 새끼들 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베란다 창고에 숨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영웅이는 거실에서 다 봤습니다."
"아, 경헸구나."
듣고만 있기 뭣한지 복자가 맞장구를 쳤다.
"지난 여름에 영웅이 생일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깜빡 잊었다고 했지만 케이크 살 돈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영웅이가 빵집에 케이크 구경을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걔를 밀쳤습니다."
"어...... 그래."
"우리가 거지니, 화를 냈습니다. 영웅이가 다시는 거지가 되지 않겠다고 빌었습니다. 나는 영웅이가 자꾸자꾸 빌어도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 경헸구나."
정수리가 햇볕에 뜨거워질 때까지 인사는 이어졌고, 결국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버렸다. 우리는 물이 돼버린 아이스크림을 들고 털레털레 동리 쪽으로 걸었다. 오던 길과 달리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꿨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애에게 구질구질함을 내보인 데 뒤늦게 짜증이 나고 있었다.(p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