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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단상] 나는 은혜 갚는 까치다

- 출산 후 부부사이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다

by 쿨자몽에이드

남편은 헌신적인 남자친구였다.


남편과 나는 2015년에 만나서 2021년에 결혼했고, 2024년에 아기를 낳아 2025년에 이르렀는데 남편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2015년에 만남을 시작하고 100일 정도, 그리고 아이를 출산한 2024년부터 지금까지다.


우리는 길다면 긴 연애를 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산 기간도 수년이었지만 관계가 좋았다.


남편이 가장 헌신적이었을 때는 출산직전이었고, 그전에는 나의 대학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출산 직전에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는데, 남편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도 살뜰히 보살폈다(고 생각한다. 비록 조리원에서 하루도 잔 적 없지만)


임신기간에도 괜찮았다.


남편이 가장 문제적으로 느껴졌던 때는.. 이 사람과 만나야 하나 혹은 계속 살아야 하나 고민했던 때는 만남을 시작할 즈음(내가 기존에 만나온 사람들과 달리 너무 투박하고 거칠었다), 유산을 했을 때, 그리고 아이를 출산하고 최근까지다(지금까지 일수도).

내가 생각하는 남편은 순하지 않지만 착하고, 성실하고 자기 일에 열심이고 나를 잘 보살펴주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못된 구석도 있고, 너무 품위 없는 말투로 말하거나 행동을 해서 아 뭐야 싶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물도 잘 보살피고, 사람도 잘 보살피고 크게 선을 넘지 않는 뭐 그런 다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서 너무 나를 실망시킨다.


일단 자기가 하기로 약속한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아기를 똑바로 돌보지 않는다. 내가 남편에게 부탁한 것은 아기랑 하루 1시간 적극적으로 놀아주기, 아기 베이비룸 청소다.

나는 아기가 자는 시간에 조차도 아기 옆에서 깨지 않게 케어해야 하는 입장인데, 본인은 하루 1시간도 놀아주지 않고 누워서 아무런 의미 없는(본인여가생활이상의 의미 없는) 유튜브나 보면서 아기 베이비룸 청소, 실제로 10분도 안 걸리는 그 조차 하지 않아 나를 실망시킨다.


그리고 과자를 돌아다니면서 먹고 흘리거나 ㄱ사탕껍질을 제대로 안 버려서 아기가 봉지를 주워먹는일 등도 생기는데 그런 것들에 대해 내가 하라고 하면, 바로 삐진다. 화낸다.


응당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않으면서 지키라노 하는 말은 잔소리고 지적은 기분나쁘다는건데 어이가없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삐지면 아기를 돌보지 않는다. 마치 파업하는 것처럼.


내 자식인 어린 아기를, 내 기분 따라 돌볼지 말지 결정하나? 그 태도 자체가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


자신의 부모님과 관련된 귀찮은 일은 기꺼이 처리하지만, 자신의 자녀에 관련된 중요한 일도 미룬다.


이런 것들이 쌓여 이제 정이 떨어지게 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참다 참다 병 걸릴 거 같은데, 계속 참아야 하는가.


이 인간이랑 같이 살지 말지를 결정하고, 참을지 말지를 고민해 보자. 같이 살지 않을 거면 내 몸 상해가며 참을 필요가 없다.


문제는 아기였다.


왜 저 인간이 무책임하게 행동해서 우리 아기가 아빠 없이 자라야 하는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럼 오래된 얘기처럼 '애 때문에 참고 살아야 하는가'


애 때문에 참고 살기도 싫고, 아무 잘못 없는 애가 아빠 없이 자라야 하는 것도 싫은데?


진정 진퇴양난인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친구에게 물었다


"너도 결혼생활 할 때 엄청 참고 참았었냐. 나 진짜 참다가 병날 것 같다"


친구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참고로 친구는 이혼했다)


"좋았던 때를 떠올려 봐"


뻔한 소리 같지만 진심이 느껴져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지난 연애기간 동안 남편이 고마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를 위해 격주로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남편은 그저 차에서 기다리거나 등산을 하며 내 휴식시간을 기다렸다가 같이 밥을 먹고(사주고) 힘들어하면 바람도 쐬게 해 주고 건강하고 몸에 좋은 간식거리를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줬다.


자기는 싫었지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할 수 있게 도와주고 면접 같은 것들을 볼 때도 의지하는 나를 위해 휴가 내어 이 지역 저 지역 데리고 다녀주고..


항상 나를 위해 자기의 모든 시간과 공간, 일상을 내어주고 아낌없이 돌봐주었던 게 생각이 났다.


지금의 나는 남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을 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남편의 공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해 나는 남편에게 무엇을 해줬던가 싶었다.


나에게는 나의 남자친구로 하여금 매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 게 만드는, 그리고 주위사람들도 내가 내 남자친구를 너무나 몹시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나도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어서 남편은 남자친구시절 무척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 줬는지 , 그가 내게 해 준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얼마나 보답했는지 생각해 보니 해준 게 없구나 생각이 들 만큼 내가 받은 것들이 확실히 컸다.


그리고 내가 감동받을 만큼 고마웠던 몇몇 순간들도 떠올랐다.


내가 힘들었던 때 만나서 이 사람 덕분에 다시 밝은 원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기에 이 사람과 결혼했던 거였는데.


그래서 앞으로 살면서 남편에게 좋은 것만 해줘야지, 돈 많이 벌어서 남편 하고 싶은 것 다 하게 해 줘야지 생각해 왔는데.


그래서 생각했다.


이제 무례하게 짜증 내더라도

하기로 약속한 일을 또 안 하더라도

못되게 굴더라도

열받게 하더라도


좋게 대하자. 내가 조금 더 이해하자. 내가 한 번은 더 여유롭게 받아주자. 내가 조금 더 희생하자.


아기 앞에서 화내거나 하는 아빠로서 빵점인 행동은 용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게 얘기하자. 열받지만 달래자.


왜냐하면

나름대로 스트레스받고 있는 것은 아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스트레스를 조금은 받아주자



받아주기 시작하면 습관이 될까 봐 염려되지만 그래도 일단 당분간은 받아줘 보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그때까지만 내가 더 양보하고 배려하고 받아주자.


애 낳고 2년 정도동안 각자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향후 부부간 관계가 결정된다는데, 그 정도로 애 낳고 2년은 대부분이 무척 힘들다는데 그 기간 내가 조금 더 포용해 보자.


그게 연애기간 7년 동안 그가 내게 해 준 고마운 것들에 대해 보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자.


우러나지 않는데 저렇게 해보자 이게 아니고

정말로 그 고마움들을, 그가 저축해 놓은 헌신들을 나도 그에게 헌신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남편은 여전히 대체로 1주일 중 2-3일은 착하고 3-4일은 나를 무척 열받게 하지만, 내 마음이 변하니 화도 덜나고 남편이 짜증 묻어나는 태도를 보여도 부딪히지 않고 좋게 넘어가는 여유로움도 생기는 것 같다.


뭐, 작심삼일일 수도 있지만 한 번 노력해 볼 생각이다.


진짜 뻔한 얘기, 그러나 관계에 관한 오래된 얘기


"좋았던 때를 떠올려 봐요"


이 한 마디가 우리 가정에 요 며칠 평화를 가져왔고 당분간 평화를 가져다줄 것 같다.


고전명작동화, 은혜 갚은 까치가 생각난다.


까치도 은혜를 갚는데, 나도 남편에게 은혜를 갚아보자 싶다.


역시, 클래식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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