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마치, 데뷔한 적도 없는데 은퇴하고 싶어지는 기분
아침에 메일함을 열었더니 지난 1월 제출한 학회 투고 논문 결과 메일이 와 있었다. 이번 학회는 무려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거라, 꼭 가고 싶은 마음에 있는 페이퍼 없는 페이퍼 끌어다 여러 개를 제출했었는데, 메일 제목을 보는 순간 기분이 싸했다. 보통 어셉된 논문은 시작부터 congratulation이 보인다. 리젝 된 논문은 오피셜 한 말투로 시작한다. 메일을 누르기도 전에 메일 제목 옆에 언뜻 보이는 내용이 왠지 정중해 보였다. 설마..
결과는.. 투고한 총 다섯 개 논문 중에서 내가 1 저자로 쓴 논문들은 다 리젝이었다. 그 외 나머지는 선배 논문에 공동저자로 들어간 게 두 개, 후배 논문 도와준 게 하나... 내가 1 저자가 아닌 논문들만 어셉 돼있었다. 물론 각자 제출한 분과가 다르고, 내가 1 저자였던 논문들은 full paper 형식이라 더 경쟁이 치열하고 엄격하게 심사했을 수 있다 (나머지 3개는 포스터 형식이고, 경쟁이 비교적 덜했던 새로 시작한 분과였다. 그걸 노리고 낸 것도 있다). 그래도 나름 내가 1 저자로 낸 논문 두 개 다 엄청 공을 많이 들였고, 또 오랜 시간 준비한 논문들이었는데, 아무리 경쟁이 치열했다지만, 그 정도쯤은 내가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이번에 제출한 학회는 원래 항상 미국에서만 열리던 학회였다. 그런데 2025년에 거의 10년 만에 북유럽에서 열린다고 해서, 나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또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이번 학회에 어셉 되는 것이, 탑저널 투고되는 수준이랑 같을 수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이렇듯, 어려울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다를 거야. 나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하고 말이다.
그래도 공동작업한 여러 논문들로 인해 어찌어찌 코펜하겐은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내 실력으로 당당하게 쟁취해 낸 입장권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리젝을 통해 '넌 이 정도밖에 안 돼'라고 확인받은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걸까? 평소엔 그렇게 남들보다 잘하고 싶다는 경쟁심이 강한 것도 전혀 아니면서, 유난히 떳떳하게 살겠다는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막상 이렇게 '내 실력으로 얻은 게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이럴 때만 괜히 그럴듯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려는 양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웃기는 일이다.
나도 안다. 이게 그저 '논문 한 편 떨어진 일'일 수도 있다는 걸. 그런데 자꾸만 이 작은 거절이, 내 존재 전체를 부정당한 기분으로 커진다. 올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두 번째 리젝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열심히 한 자 한 자 써가며 보고 또 봤던 내 자식 같은 페이퍼가 거절당하고 돌아오면, 마음이 쿵 내려앉아 한동안은 기분을 끌어올리기가 힘들다. 살면서 내가 흥행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아닐 수도 있다고 수없이 배워왔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느낄 때면 나는 다시 한없이 가라앉게 된다. 페이퍼 리젝은 건설적인 조언이랍시고 부족한 점에 대해서 줄줄 적은 리뷰 페이퍼도 같이 와서, 그걸 읽다 보면 궁지에 몰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이건 마치, 데뷔한 적도 없는데, 은퇴하고 싶어 지는 이 기분. 그저 출발 선상에 서는 것만으로도, 비참해지는 이 기분.
학교에 가서, 다른 동료들도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면 좀 위로가 될까? 다들 비슷했다는 걸 알게 되면, 적어도 나만 모자란 건 아니라는 안도는 조금 생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익숙해진다는 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 아픔을 덜 당황스러운 얼굴로 견디는 법을 조금씩 익혀가는 것 같다.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생각한다. '괜찮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안 괜찮을 이유도 없지! 앞으로 기회는 많고, 이거 하나로 모든 게 망한 것도 아닌데!' 나에게 필요한 건 묵묵히 견뎌야 할 시간과, 그 시간 동안에도 자리를 지키는 나 자신뿐이다.
2025.03.26. 07:30 AM 씀
2025.04.21. 08:00 AM 발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