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대학원 오지 말라는게 아니다.
돈이 없다.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돈이 없다. 지난달 카드값이 미처 다 빠져나가지 못한 내 통장 잔고는 정말 "0"원이다(심지어 카드값이 다 못 빠져나갔으니 마이너스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장 이번 주말에 가야 할 결혼식이 두 번인데, 축의금은 어떡하지? 남편에게 "너 돈 좀 있니?"하고 불량스럽게 물어본다. 남편도 돈이 없다. 통장 잔고가 15만 원이란다. 한 명 축의금은 때울 수 있겠다. 나머지 한 명은? 일단 그때 가서 생각하자.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겠지. 내가 대학원에 와서 제일 많이 생각하는 말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 글은 본격 가난한 인문사회 대학원생의 현실 소개, 푸념, 또는 구걸이다(그렇다고 저에게 돈을 달라는 것은 아니고…, 혹여나 제가 약속에 참여하길 주저한다면 이런 이유는 있지 않을까 하고 이해해 주십사….) 제대로 된 수입 없이 공부를 이어가기 위해 결혼이라는 전략적 결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고학력 저소득자가 하나에서 둘이 될 뿐이었다. 오히려 결혼 전에는 내가 저금해 놓은 돈을 내가 쓰는 거니까 눈치라도 덜 보였는데, 이제는 둘의 공동 자산을 내가 더 많이 쓰게 되니까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다. 남편이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서로 몰랐던 일도 아닌데, 나 혼자 미안하다. 정작 성실한 캐시카우인 내 남편은 회사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하기 때문에 돈도 잘 안 쓴다. 나만 쓴다. 나만.
애도 없는데 신혼부부가, 학생이 어디에 돈을 그렇게 쓰냐고? 나도 그게 궁금하다. 가계부 내역을 샅샅이 뒤져본다. 내가 옷을 사는 것도 아니고, 배달을 자주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분석 결과 식비, 공과금 등 생활비를 제외하고 크게 돈이 나가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1. 부부 경조사비
신혼시기가 돈 모으기 최적의 시기라지만 글쎄, 오히려 이 시기에 돈 나갈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처음으로 참석하는 양가 가족 모임이 두 배.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열심히 받은 사랑을 여기저기 갚아나가야 한다. 예의상 하는 일이 아니라 진짜로. 결혼식을 준비해 보니 정말 너무 힘든 일이고, 남의 행사에 직접 와서 축하해 준다는 게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라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내 큰 경사를 한번 치러보니, 남의 경조사가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참여해야 할 경조사가 두 배…. 게다가 주변에서 또 다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다 보니, 매 달, 경조사 두 세 건 정도는 필수 참석인 것 같다. 그리고 돌아서면 명절, 어버이날, 양가 가족들 생일…. 사랑과 지갑 사정은 반비례한다.
2. 공부에 드는 여러 구독료 및 프로그램 구매
AI가 나오면서 더 이상 이 녀석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논문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도 처음에는 '예전에는 없이 잘만 썼는데 굳이 써야 하나?'라는 생각에 버텨보기도 했다. 하지만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의 생산성 차이가 너무나도 나서, 안 쓸 수가 없다. 나는 겨우겨우 한 문장씩 써가는데, 주변에서는 영어 번역과 문법 교정과 paraphrasing까지 현란하게 하면서 하루에 두 세장씩도 영어 논문을 써가니까 당최 안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AI 툴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까지는 또 그렇지가 않아서 당장 내가 쓰는 것만 chatGPT, 그리고 문법 교정 전문 AI 이렇게 두 개다. 더 늘리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기술의 발전이 겁이 난다.
게다가 통계 프로그램은 왜 이렇게 또 발전을 하는지….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SPSS, 공짜인 R 외에도 새로운 분석방법을 쓰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사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또 구매…. 쓰는 와중에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 됐다고 하면 또 새로운 패키지 구매…. 한 프로그램으로 모든 통계를 다 돌릴 순 없냐고? 통계 고수가 되면 그렇게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뼛속부터 문과인 나는 돈을 써야만 겨우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하하…. 그리고 환율!!!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달러 결제다 보니 요즘 같은 시기, 더 비싸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3. 연구비
그리고…, 가끔씩 찾아와 내 지갑은 물론이고 통장까지 싹 다 긁어가는 범인은 요놈. 연구비다. 이공계는 연구비 지원도 되고, 심지어 월급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닐 정도라고 하던데, 인문사회 쪽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그래고 나름 인문사회계열 쪽에서 순수학문보다는 실용적인 쪽이라, 다들 학과 이름만 들으면 '문과에서는 그래도 돈이 많은 학과 아니야?'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세부전공에 따라 또 다르고, 학교마다 다르고, 연구실마다 달라서 할 말이 많다! 우선 우리 연구실은 전-혀 없다. 전혀, 어떠한 금전적 지원도, 연구 외에 돈을 벌 수 있는 부수적인 프로젝트도 없다. 따라서 모든 연구를 내돈내산으로 해야 한다. 보통 한 편의 논문을 쓰기 위해 하나의 연구를 하는 데 있어 4-500만 원 정도. 그런데 내가 연구를 1년에 하나만 하지는 않으니까…, 보통 1년에 저렇게 적게는 두 번 많게는 세 번 정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벌써 1000만 원이 훅.
어떤 학교 또는 어떤 전공들은 BK21사업이라고 국가 연구 관련 프로젝트라도 받아서 한다는데, 우선 우리 전공은 해당 프로젝트도 없을뿐더러, 잊지 말자. 돈을 받는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내 연구를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든다(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일단은 교수 임용을 위해 논문 실적을 쌓는 게 최우선인 나로서는, 실적이 안 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논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짜 수입이 없냐고? 여기 작고 소중한 내 수입을 공개한다. 우선 박사생들은 학교에서 작고 소중한 장학금을 준다. 수업을 듣는 과정생일 때는 등록금 면제 + 한 달에 70만 원, 수료생일 때는 등록금이 없으니 한 달에 100만 원. 이게 내 기본급이다. 그럼 여기에 수당을 쌓아보자. 학교에서 하는 조교 일은 금액이 정해져 있다. 한 과목 조교당 한 달에 30만 원(세금 뗍니다. 하하. 실제로 27만 얼마 정도). 석사 마지막 학기 때,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나는 한 학기에 조교를 6과목이나 한 적도 있었다(그래봤자 한 달에 180만 원이다). 조교를 하면 이제 또 잡무가 많아진다. 교수님 수업 준비, 수업 자료 만들기, 출석 체크, 과제 체크, 시험 감독…. 이걸 한 학기에 6과목을 하니까 정말 사는 게 못되더라. 그 학기가 끝나고 나서, 너무 힘들었던 나는 겨울방학 두 달간 잠수를 탔다.
지금은 한 달에 100만 원 기본급에 조교 두 과목(60만 원)으로 버티는 중이다. 그렇게 내 수입은 한 달에 160만 원…. 가끔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1년에 평균적으로 5번 정도? 그렇게 크게 생활비에 보탬은 안된다. 애초에 강의비가 크지도 않고. 강의비를 제외하고 정기적 수입만 계산해 보자. 한 달에 160만 원 * 12개월 = 1920만 원인데, 내가 1년에 쓰는 돈은 연구비, 경조사비, 구독료 등 포함해서 1500만 원 정도. 하하! 남편이 없으면 난 진작에 길바닥에 나앉았다!
연구실 선배는 돈이 없어 생활비 대출까지 여기저기 끌어썼다고 했다. 그 선배는 이제 조건 없이 대출해 주는 제 1 금융권 생활비 대출의 달인이 됐다(그 와중에 배운 사람이라 절대 제 1 금융권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고럼고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생들은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으으, 지금 데이터 모아보면 딱인데! 이 연구 너무 해보고 싶은데…! 이 프로그램 너무 써보고 싶은데…!!!. 애초에 박살 난 경제성의 논리 속에서 지적 욕구만을 충족해 보겠다고 들어온 사람들이니 오죽할까. 이럴 때 보면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대학원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뭐, 언젠간 볕 들 날 오겠지. 매일 온라인에서 1+1하는 츄리닝을 사 입고 귀엽고 상큼한 학부생들 사이에서 후줄근하게 등교를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의 눈빛은 무엇보다 빛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텅 빈 지갑과 함께 5500원 짜리 학식을 긁으면서 연구실 선배와 눈을 빛내며 대화한다. 이거 연구해보면 재밌겠다. 저거 해볼까? 하며.
근데 진짜, 카드 값, 경조사비 어떡하지.
거의 요즘 내 수준...^^
2025.04.16. 07:30 AM 씀
2025.04.17. 07:30 AM 마무리
2025.05.12. 08:00 AM 발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