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이라고 쓰고, 그저 워크라고 읽는다.
대학원에 오기 전에도 나는 꽤나 워라밸 없는 삶을 살았다. 아니, '워크' = '라이프'인 삶이었으니 차라리 밸런스가 있는 삶이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교복이라는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는, 절대 출퇴근 안 하는 직장에 다녀야지!라고 다짐 했고, 결국 프리랜서처럼 일할 수 있는 직장에 취업하기에 이르렀다(이걸 보고 우리 엄마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프리할 때는 일이 없을 때뿐이라고 했던가. 나 역시 출퇴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수준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은, 결국 언제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일 수많은 프로젝트의 납기에 허덕여 밤을 새웠고, 자주 지방 출장이 있어 남들이 출근도 안 하는 아침 7시,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굳이 저렇게까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 모습이 되었다. 가끔 여유 있는 날이 오면 하루 종일 잤다. 계획을 세울 수 없는 매일이었다. 그래도 억압과 구속이 싫었던 나에게는, 비록 가끔 밤을 새울지언정, 일하는 시간과 공간을 누군가의 간섭 없이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학부보다 들어야 하는 학점이 작은 대학원이라, 처음 취업했을 때처럼 꽤나 여유롭게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 석사 과정에 들어서고 나는 학교를 떠날 수 없었다.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오롯한 학자가 되기 위한 길이라지만, 갓 입학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기 같은 상태였다. 관련 분야 직장인이었다는 나름의 근거 있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수많은 영어 논문과 웃으면서 공격하는 교수님들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매일 선배를 붙잡고 모르는 걸 물어보고, 동기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복습하고, 과제에 파묻혀 지내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항상 학교에 출근해서 누군가라도 붙잡아야 했고, 또 지도교수님과 함께 연구실을 쓰다 보니 출석에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항상 8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하는 아침형 교수님 덕분에 나도 한 시간 반 걸리는 출근길을 교수님의 출퇴근 시간과 꼬박꼬박 맞췄다. 교수님은 일찍 퇴근하신다지만, 나는 대부분 저녁 9시, 10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또다시, '워크' = '라이프'인 나날들의 시작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학부때와 달리 한 주에 과목도 세 개 밖에 듣지 않고, 출근을 안 한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실제로도 교수님이 출근을 강요한 적은 없다. 나 혼자 교수님의 눈치를 보았을 뿐…. 오히려 교수님은 나가서 세상을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고도 하셨다.) 심지어 몇몇 친구들은 유튜브를 찍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요즘 샤대 대학원생 브이로그가 그렇게 인기라면서. 생각해 보면, 정해진 스케줄이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뭔가를 해야 했고, 누구에게든 응답 가능한 상태로 있어야 했으며, 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항상 그곳에서 눈에 띄는 상태로 있어야 했다. 이와 더불어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좌절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직장생활도, 대학원생활도 나는 '워크'와 '라이프'의 분리 대신, '워크' = '라이프'일 수밖에 없었다. 나름의 밸런스라면 밸런스라고 자위한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정해진 팔자가 있어서, 팔자대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남이 정해준 대로 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바쁨이 끊이지 않는 나를 보며 가끔은 모든 게 정해진 길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직장생활 5년, 석사 2년, 박사 2년, 코스웍을 마치고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내 '워크'와 '라이프'를 분리하지 못한다. 나는 정해진대로 살기보다는 내가 결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하고 싶을 때 일하고, 하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지금이, 그리고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바쁜 일상 속에서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옷을 입고 출근하고, 남들과 같은 시간에 퇴근해 지친 저녁을 보내는 것보다는, 계절의 정취를 느끼기도, 가끔 평일 낮에 미용실을 갈 수도 있는 나의 '워크'이자 '라이프'가 퍽 만족스럽다.
2025.03.18. 07:30 AM 씀
2025.04.15. 07:30 AM 글 마무리 및 발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