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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Nov 20. 2023

어느 초겨울의 생생한 저녁 식사

내가 오마카세를 좋아하는 이유

(전 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늦은 오후가 되니 컨디션이 좀 괜찮아졌다. 남편과는 언주역 3번 출구에서 만나 일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전자책을 읽으면서 가고 있는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아 갑자기 회의함'


그렇지. 퇴근 직전에 회의 잡히는 건 국룰이지. 예약한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언주역에 내렸다. 출구 바로 앞에 서있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고 바람이 꽤 차가웠다. 미처 허리끈을 묶지 못해 자꾸 벌어지는 코트를 계속 여미면서, 행여 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조금씩 자리를 옮기면서 남편을 기다렸다. 목도리라도 할걸.


몇 분 후, 서둘러 오는 남편이 보였다. 맨날 보는 얼굴인데도 밖에서 보면 또 반갑다. 다행히 빠르게 걸으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길이 만만치 않았다. 오르막길인 데다, 어둡고 비가 오고 차가 연달아 지나가서 계속 앞뒤를 살피며 걸어야 했다.


남편은 발걸음을 재촉했고, 나는 이렇게 길이 불편한데 강남은 왜 땅값이 비싼 것인지, 그리고 도대체 왜 평소에 신지도 않는 구두를 신고 와서 굼벵이처럼 걸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며 남편을 졸졸 따라갔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식당 문을 열었는데, 오, 다른 세상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잔잔한 음악과 함께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음, 분위기 좋다!'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인테리어가 깔끔한 게 내 스타일이었다. 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8명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다찌석이 있고, 한쪽 벽면의 선반 위에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톡 부러질 듯 얇은 다리를 가진 와인잔들이 쭈욱 진열되어 있었다.


다른 쪽 벽면에는 마치 보름달을 연상시키는 크고 둥그런 조명과 꽃 장식이 있었는데, 이게 내가 오마카세집을 고를 때 사진으로 보고는 '왠지 익숙하게' 느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내가 실제로 이곳에 와서 저걸 보고 있네. 신기하구먼.'


준비되어 있는 둥굴레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정갈한 그릇들. 생선가시처럼 얇은 젓가락 한 쌍이 가로로 나란히 놓여있는 게 아기자기하니 귀엽다. 아직 코스가 시작하기 전까지 2-3분의 시간이 있었다. 셰프님은 분주히 초밥을 준비하시고, 둘러앉은 손님들은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잠깐의 여유를 나는 좋아한다.


열정적으로 와사비를 갈고 계신 셰프님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첫 번째 요리가 전복 튀김이었다. 보통 튀김 종류는 끝에 나오지 않던가? 여기만의 방식이 있겠지 하며 한입 왕! 물었는데 따뜻하고 바삭한 튀김에 녹진한 게우(전복 내장) 소스가 어우러져 속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문어요리가 나왔는데, 짭조름한 간장 소스가 아주 감칠맛이 있었지만 쉬지 않고 씹어야 할 만큼 딴딴해서 내 취향은 아니었다.


뒤이어 내가 좋아하는 아귀 간, 광어 지느러미, 도미 조림 등 츠마미(초밥 전에 나오는 음식)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양이 꽤 많은 편이었다. 초밥이 나오기 전부터 살짝 포만감이 느껴졌다.


도미 조림 플레이팅이 예뻐서 올려봅니다. 고추는 매워서 남편에게 패스!


초밥도 크기가 큰 편이었다. 회도 크고, 밥 양도 많아서 나는 밥 양을 조금 덜어달라고 요청했다. 셰프님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초밥을 쥐어 8명의 접시 위에 연달아 놓아주셨다. 도미 초밥, 참치 초밥에 이어 처음 먹어보는 피조개 초밥, 내가 좋아하는 전갱이 초밥까지 즐거운 식사가 이어졌다.


고소한 전갱이 초밥이 너무 좋아효


가끔 위기도 있었는데, 입이 작다 보니 큰 초밥을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우니(성게알)와 단새우를 올려 김으로 싼 초밥은 한 입에 넣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중간에 자르기도 애매하여, 어떻게 먹을지 요리조리 입을 대며 간을 보고 있는데, 얄밉게도 남편은 내가 어떻게 먹는지 보려고 짓궂은 표정으로 얼굴을 바짝 대고는 눈길을 떼지 않았다.


우니와 단새우 조합.. 말해 뭐해요!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살짝 기울여, 누가 볼세라 잽싸게 입으로 욱여넣었다. 킥킥거리는 남편 옆에서 양볼이 빵빵해진 채로 부드러운 우니와 단새우의 맛을 음미했다.


내가 오마카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음식이 맛있기도 하지만 남편과 식사 시간을 진하게 즐기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셰프님이 준비하는 순서대로 음식을 주시기 때문에, 한 가지 요리를 먹고 다음 요리를 먹기 전까지 조금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 남편과 소소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게 참 좋다.


조용한 분위기라 편하게 수다를 떨 수는 없지만 대신 우리는 속닥거리며 '눈으로 말해요' 게임을 한다. 하나를 먹고 눈을 맞추며 얼마나 맛있는지를 눈빛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진짜 맛있지? 녹는다 녹아.'


참치 뱃살은 녹진함 끝판왕입니다.


우리는 감탄을 많이 하는 편이라, '으음~~(너무 맛있잖아!!)' 소리를 종종 내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셰프님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착각일 수 있겠지만, 오늘도 추가로 만든 고등어 봉초밥 한 알을 어김없이 오빠의 접시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아 주시는 걸 보면 꽤 근거 있는 착각인 듯하다. (참고로, 셰프님들은 귀가 정말 밝다.)


보통 오마카세에서는 여유 있게 두 시간 정도 식사하는데, 다른 곳에 비해 요리가 나오는 속도가 빨라서 코스가 끝날 때쯤 되니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마지막 요리는 포실포실한 계란말이와 간장양념한 박고지를 김에 싼 초밥이었는데, 이걸 먹을 때쯤 내 배는 이미 빵빵하게 불러 있어 바지 후크가 위태로웠으나, 이 맛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미련하게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이거 먹을 때가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디저트를 기다리는데, 이때가 또 재밌다. 셰프님의 눈치싸움이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마카세마다 셰프님의 스타일이 조금씩 달라서, 요리를 내주시는 중간에 말을 거는 분도 계시고, 오늘 만난 셰프님처럼 중간에는 묵묵히 요리만 전달해 주시는 분이 계신데, 후자인 경우 디저트를 기다리는 시간에 손님과 대화를 시도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예약 인원은 총 8명이었고, 2명씩 4팀이 앉아 있었다. 셰프님은 한 팀 한 팀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고 싶으신 듯 보였다. 다른 팀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셰프님은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운 듯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셨고, 그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두 분은 연인이세요?"

틈을 놓칠세라 셰프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부부예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연인인 줄 알았어요."

"아 진짜요? 감사합니다."


셰프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신 놀라워하셨다. 나는 남편을 흘깃 보며 씩 웃었다. 아직 연인 같아 보인단 말이지? 엣헴!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희 다음 주가 2주년인데 그날 여기 예약이 꽉 차서 오늘 온 거예요."


셰프님은 또 한 번 놀란 듯 말씀하셨다.

"와아, 저는 지난주에 결혼 2주년이었어요!!"


처음 만나는 사람과 묘한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때, 참 반갑다. 요리하실 때는 무표정으로 계셔서 말을 걸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대화하면서 보니 잘 웃으시고 재밌는 분이셨다.


셰프님과 몇 마디 더 나눈 후, 드디어 디저트가 나왔다.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 위에 바삭한 로투스 과자 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완벽한 마무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마지막으로 달콤함을 즐겼다.




밖은 여전히 추웠다. 배가 불러 나른해진 몸을 지하철에 싣고 '지하철 멍'을 때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바지를 갈아입고 배를 해방시킨 뒤, 소파에 널브러져 더부룩함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과식을 하지 않겠다.'


이 결심을 도대체 몇 번째 하는 것인지? 유튜브에서 간헐적 단식과 소식을 주장하는 나인데 이렇게 과식을 한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 겸연쩍지만, 며칠 전 구독자분께서 댓글로 '엄청 솔직하시고'라고 써주셨기에, '엄청 솔직하게' 과식했음을 고하고 있다.


글을 퇴고하면서 보니 저녁 식사 한 일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쓸 일인가 싶다. 그래도 올해가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 한 끼 특별했던 저녁 식사를 선명하게 글로 남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내용을 줄이지 않고 올려본다.


여기까지 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내일 초밥을 드실지도..? 그게 아니라면 내가 좀 더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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