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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Dec 14. 2023

전세 보증금 주세요. 네?

왜 안 줌?

전세 만기일까지 대략 2주 정도가 남았다. 지금쯤이면 보통 이사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알아볼 시간인데 나와 남편은 이사 갈 집 계약조차 하지 못했다. 임대인이 돈이 생길 때까지 보증금을 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집을 좋아한다. 역세권 신축 건물, 깔끔한 인테리어와 구조, 해 잘 드는 남동향에, 멋진 뷰까지. 여러모로 원하는 조건에 맞았기에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음에도 나는 이 집을 신혼집으로 선택했다.


입주 직후 작은 문제로 임대인과 아빠와의 말다툼이 있었고, 그 이후로 부모님은 임대인 얘기만 나오면 탐탁지 않아 하셨다. 나는 단편적인 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제 드디어 그 사람의 실체를 맞닥뜨렸다.


만기일까지 보증금을 달라고 요구하자 임대인은 '전화드릴게요'라는 말로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더니, 어제 겨우 전화해서는 낯두꺼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기한에 맞추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수한 상황이다.

의무를 다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증보험을 연장하고 기다려달라.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선의의 피해자다.


그는 시종일관 나름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네 말 알았는데, 어쩔 수 없어. 배 째.'


나는 내용증명을 보내겠다 했고, 임대인은 내용증명 보내시고 준비할 건 하시라고 대답했다. 통화를 끊은 후 남편과 나는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전세사기인가? 뉴스에서만 보던? 돈이 생기면 주겠다는 것이니 완전한 사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책임감 없는 임대인임은 분명하다.


이 집은 12월 말에 계약이 종료되고, 우리는 만기날까지 갚아야 할 대출이 있다. 제때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대출을 연장해야 하고, 전세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하고, 보증보험 관련해서도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라 아무리 늦어도 보증보험이 끝나는 1월 말까지는 보증금을 받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는 일단 급한 돈만 먼저 주시고 나머지는 1월까지 달라고 하였으나, 그마저도 어렵다고 해서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임대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대출과 보증보험 기간을 연장하고, 세입자가 구해지거나 본인이 돈을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요구했다. 우린 할 말을 잃었다.


서늘했던 통화 후, 남편과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빠르게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보증보험에 가입해 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알아본 결과, 1) 내용증명 2) 임차권 등기명령신청, 3) 보증보험 이행청구를 하기로 했다. 용어가 어려운데(나도 이전까지 전혀 모르던 내용들이다) 임대인이 아닌 주택도시보증공사를 통해 보증금을 받기 위한 절차들이라 보면 된다.


12월 안에 세입자가 들어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사 갈 집을 구해놓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진행하게 되면 보증금을 받기까지 3-4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2024년의 시작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연말에 액땜 제대로 한다.




앞으로 이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나와 남편은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감정 소모는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항상 유튜브를 통해 말하듯, 마음 편한 게 가장 중요하니까. 어차피 벌어진 상황이라면 난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는 것을 택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놨고, 차근차근 해 나갈 것이고, 그래서 걱정할 일은 없다. 자연스럽게 잘 흘러가리라 생각한다.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현실에는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우주는 가끔 시련을 주기도 한다. 이번 일은 나에게 왜 일어났을까? 나는 내 마음과 감정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게 될까? 여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며칠 전에 봤던 글귀가 생각난다.

"완성은 항상 혼돈 가까이에 있다."

나는 지금 혼돈 속에 있다.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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