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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Jan 10. 2024

기분 전환하러 왔습니다

스타벅스에요

노트북을 들고 스타벅스에 왔다. 음료는 따뜻한 민트 블렌드티.


스타벅스에는 커피나 카페인 음료를 못 마시는 내가 마실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물론 프라푸치노나 블렌디드 중 몇 가지가 있지만, (그리고 우유를 다른 걸로 변경해 주는 건 정말 고맙지만) 난 찬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이런 음료는 당이 많아서 자주 찾게 되지는 않는다. 까다롭구먼?


지난번 글에서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완성은 항상 혼돈 가까이에 있다."
나는 지금 혼돈 속에 있다.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라고 쓰며 마무리했었는데, 아쉽게도 그 글을 쓴 지 대략 4주가 지난 어제까지만 해도 혼돈 그 자체였다. 어제 이사 갈 집 가계약금을 걸었으니 오늘부터는 그래도 혼돈이 거의 끝난 듯 하지만 아직 심리적인 여파가 조금 남아있다. 그래서 기분 전환을 위해 바리바리 싸들고 스타벅스에 왔다.


그저께는 내 인내심을 극한까지 테스트하는 하루였다.


나는 오전 내내 1) 임대인 2) 관리인(임대인 대리하는 사람) 3) 이 집을 보여주는 부동산 중개인 4) 내가 이사 갈 집을 보여주는 부동산 중개인 5) 엄마 6) 아빠 7) 남편까지 총 7명과 번갈아가며 전화와 카톡, 문자를 하면서, 양쪽을 오가며 이야기를 전하고, 독촉을 받고, 나 역시 재촉을 하고, 미안해하고, 답답해하고, 한숨을 한 10번 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정신적 에너지를 모두 소모했다.


적게는 몇 천만 원, 많게는 몇 억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내가 자칫 실수하여 부모님이나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매 순간 깨어있으려 노력했으나, 중간중간 감정에 휩쓸렸고 내 멘탈이 나약해진 틈을 타고 걱정과 불안과 임대인에 대한 원망이 스며들었다. 내 긍정 파워 어디 갔지?? 나 여기 있어.. 근데 상대가 너무 센 걸? 깨갱! 2024년 새해를 이런 마음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인간의 본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내 마음이 더 괴로워진다. 본성(사랑)을 거스르므로. 그래, 내 본성대로 만인을 사랑하자!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임대인은 인생에 새롭게 등장한 빌런이었다.


실상을 종이에 낱낱이 적은 후 엘리베이터에 붙일까? 장사하는 카페에 가서 뭐 하나 사 먹고 악플을 남겨버려?


종종 속으로 소심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실제로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남편 입에서도 내가 상상하던 내용들이 그대로 나오는 걸 보면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가 보다. 아니야, 정신 차리자.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라니까!


이날 저녁까지도 기분은 계속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를 허용했다. 그저 이 경험이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뭔지, 내가 뭘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울을 끌어안았다.


'마음이 아주 착 가라앉아 있구먼. 우울해!!!!! 이렇게 구린 걸 보니 내일은 무조건 오늘보단 낫겠어.'


그렇게 기분은 바닥을 찍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어제도 진 빠지는 일이 있었지만 그저께보단 나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낫다. 평소의 에너지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신이 나는 느낌까지는 아니고.


올해는 청룡의 해고 나는 비상하는 청룡인데 (용띠입니다) 청룡이 새해부터 풀이 죽어있는 게 말이 되나 이게? 아침부터 무기력하게 있으면서 '뭘 하면 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질까?'를 생각했다. 한 번에 기분을 바꾸기 어렵다면 조금씩 '시나브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한 단계씩.


-좀 더 자고 싶어.

좀 더 잤다. (+10점)


-몸을 좀 움직여볼까?

요가를 하고 근력 운동도 조금 했다. 좋아, 에너지가 조금씩 올라온다. (+20점)


-맛있는 점심을 먹어보자.

싱싱한 사과와 샐러드, 냉동실에 쟁여둔 고구마치즈부리또를 먹었다. (+15점)


-개운하게 씻자.

샤워를 했다. (점심 먹고 씻은 거 들킴) (+15점)


-카페 가서 글을 써볼까? 오늘은 꼭 글 하나를 써서 올리고 싶다.

그래서 지금 스타벅스에 와있습니다요.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열심히 써야지.


처음에 받았을 때 찍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남겨보는 민트티의 흔적


3시 넘은 시간인데 스타벅스에 사람이 거의 꽉 차 있어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 들고 카페 가서 일하는 게 나의 로망이었는데 그동안 숱하게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노트북 싸들고 가기 귀찮다. 집에서 하는 게 편하다'라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필코 내 일상의 패턴을 깨보리라는 생각으로 장소를 바꿔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의 기분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하고 있는 패턴을 깨는 것이다. 역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된다.




뜨거워서 홀짝홀짝 마셔야 했던 민트티는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사람은 여전히 많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신나게 얘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에너지를 얻고 있다.


이제 남편이 오면 집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할 것이다. 오늘의 메뉴는 낫또밥에 연어스테이크, 그리고 양송이버섯&양파 볶음! 맛있게 해서 요즘 나처럼 기운 빠져있는 남편의 에너지도 충전해 줘야지.


오늘 했던 자잘한 일들로 어느새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기분을 가장 좋게 만든 한 가지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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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글 하나를 썼다는 것이다. 오메 기분 좋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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