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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프로 Jan 22. 2024

그가 사 온 것

남편은 엉뚱해

남편은 나보다 한 살이 많다. 오빠지만, 가끔 아이처럼 엉뚱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 짐을 챙기는데 물티슈가 없길래 남편에게(당시에는 남자친구) 물티슈를 사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올리브영에서 큼지막한 물티슈를 사 왔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여행을 하면서 손에 뭐가 묻었거나 닦을 일이 있을 때 물티슈를 썼는데, 물티슈를 써도 손이 개운하지 않은 것이었다. 보통 물티슈로 손을 닦으면 말끔해져야 하는데, 뭔가가 손에 남는 느낌이었달까. 이게 뭐지 싶었지만 가끔 물기가 많은 물티슈도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 저녁에 숙소에 와서 짐을 정리하면서 물티슈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물티슈가 아니었다. 클렌징 티슈였다. 여자들이 화장을 지울 때 쓰는 클렌징 티슈.


아, 그래서 손에 계속 거품이 났었구나... 어쩐지 손을 닦아도 계속 미끌거리고, 잔거품이 나고, 찐덕거리더라. 남편에게 물티슈의 실체를 밝혔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클렌징 티슈가 뭐야? 그거 물티슈 아니었어?"

라고 되물으며 황당해한다.


하긴,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근데 크기는 또 왜 이렇게 큰 걸 사 왔니, 난 클렌징 티슈 쓰지도 않는데.


웃음이 터졌던 기억이 새록새록.




위의 일화가 기억난 이유가 있다. 오늘도 그의 엉뚱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다 떨어져서 아까 카톡으로 퇴근길에 사 와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집은 한 뼘 크기의 작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2L짜리 봉투를 쓴다. 조금씩 모아서 빨리빨리 버리기 위해서다.


보통 10장 세트를 사는데, 다 떨어지면 남편이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사 오곤 했다. 오늘도 남편이 오면서 쓰레기봉투랑 콘칩을 사 오기로 했다.


'딩-동'


남편이 왔다. 인터폰 카메라를 슬쩍 보니 양손을 흔들면서 재롱을 부리고 있다. 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열었다. 남편은 현관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헐!!! 과자 안 사 왔다!!!!!!!! 아 까먹었어..."


"ㅋㅋㅋ뻥 치지 마. 오빠 얼굴만 봐도 알아."


역시나 그의 백팩 속에서는 과자가 4 봉지나 나왔다. 그리고 접혀 있던 음쓰 봉투.


... 근데 이게 뭐지??


왼쪽이 집에 있는 음쓰 통, 그리고 오른쪽은...


음식물 쓰레기봉투 10L?????? 우리 집 언제부터 식당 했니?


그렇다.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봉투 10L짜리를 사 왔다. 과자에 정신이 팔렸던 탓이다. 접혀있던 음쓰 봉투가 스르륵 촤-악 펼쳐지는데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10L짜리 한 장만 덜렁 사 왔다. 보통 10장 단위로 팔지 않나? 편의점 직원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듯. 그래서 한 장만 줬을 수도.


10장 세트였으면 가서 환불하고 다시 사 오라 했을 텐데, 1장이라 그냥 품기로 했다. 좀 모았다 버리면 되겠지 뭐. 앞으로 남편에게 뭔가 사 와 달라고 부탁할 때는, 꼭 명확히 말해야겠다.


'오빠, 물티슈 좀 부탁해. 클렌징 티슈 말고, '물티슈'라고 적혀있는 거!'

'오빠, 음식물 쓰레기봉투 좀 부탁해. 2L야. 1L도 아니고 10L도 아니고 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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