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만드는 허상

역사 이야기

by 오세일

피로스의 시련을 극복하고 타렌툼을 공략해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성한 로마는 기원전 264년부터 23년 동안 시칠리아를 놓고 카르타고와 격돌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 제패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카르타고에는 식민지 이베리아반도를 기반으로 한니발이라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가 성장하며 로마에 대한 설욕을 준비합니다. 기원전 218년,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에 나타난 29살의 한니발은 세 차례 이어진 로마와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연이은 패배로 괴멸상태에 빠진 로마는 노장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등용해 한니발과 맞서게 합니다. 한니발과의 대회전에서 승리할 확신이 없던 파비우스는 전면전은 피하면서 이탈리아에 고립돼 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니발군을 고사시키는 전략을 세웁니다. 지구전인 ‘파비우스 전략’은 이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가 채택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는 파비우스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기원전 216년, 로마는 노장을 해임하고 적극전을 주장하는 바로라는 지휘관을 선출해 한니발과 맞서게 합니다. 5만의 한니발군과 칸나이에서 전면전을 벌인 8만7천의 로마군은 또다시 괴멸상태에 빠집니다. 전투에 참가한 로마병력 7만7천 중 7만이 전사,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1만은 포로가 됩니다. 한니발군의 사망은 5천5백이니 로마 역사상 최대의 참패가 됩니다. 바로는 살아남아 소수의 패잔병과 함께 로마로 귀환합니다. ‘칸나이 전투’, 2,200여 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관학교에서 연구할 정도로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위 섬멸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결국 로마는 파비우스를 재등용해 한니발과 맞섭니다.


전국시대인 기원전 361년, 진(秦)나라 왕위에 오른 진효왕이 위나라 출신 상앙을 등용해 변법을 시행함으로써 훗날 전국시대를 통일할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후 진나라는 서쪽 오랑캐라 멸시받던 처지에서 전국시대 강대국으로 성장합니다.


기원전 3세기, 조나라에는 ‘완벽(完璧)’의 어원이 되는 상경 인상여, 인상여와 함께 ‘문경지교’의 주인공인 장군 염파, 그리고 장군 조사가 있어 진나라가 함부로 어찌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상여는 병들고 조사가 죽은 뒤인 기원전 260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로 진군하자 조나라는 노장 염파를 파견해 장평이란 곳에서 진과 대치합니다. 염파는 보루를 높이 쌓고 방어에 전념하며 멀리 원정 온 진나라가 지치길 기다립니다.


명장 조사에게는 조괄이란 아들이 있습니다. 조괄은 어린 나이에도 병법에 통달해 아버지 조사마저도 말로는 당해내지 못합니다. 조사는 전쟁터란 생사를 가르는 곳인데 조괄은 이를 너무 쉽게 여기니 장수감이 아닐뿐더러, 혹여라도 조괄을 장수로 기용하면 조나라는 큰 화를 입을 거라 말합니다.


진나라는 염파가 장수로 있는 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진나라는 몰래 백전노장인 백기로 장수를 바꾸고는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염파가 아니고 조괄이라 소문냅니다. 인상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왕이 염파 대신 조괄을 장수로 기용합니다. 이때 조괄의 어미가 조왕을 찾습니다. 지난날 조사의 말을 전하며 조괄을 장수로 삼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왕이 뜻을 거두지 않자 그녀는 조괄이 패전하더라도 가족에겐 죄를 묻지 말라고 다시 요청해 승낙을 받고서야 물러납니다.


50만 대군의 지휘관이 된 조괄이지만 백전노장 백기에겐 한낱 백면서생일 뿐입니다. 장평대전, 백기에게 속은 조괄은 제대로 된 싸움조차 못 해보고 목 잘린 시체가 됩니다. 백기는 40만 명이 넘는 조나라 포로를 생매장해 죽여버립니다. 살려 보낸 건 240여명의 어린 병사였다고 합니다. 장평대전의 결과로 전국시대의 판도는 진나라로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검증되지 않은 ‘말’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말’로 모든 난제가 해결된 이 땅은, ‘말’의 신세계가 됩니다. 책임을 벗겨낸 ‘말’들이 허공을 떠돌며 세상을 왜곡합니다. ‘말’이 권력이 되고, ‘말’에 줄을 서고, ‘말’은 전장이 됩니다. ‘말’은 편을 가르고, ‘말’에 현혹돼 세력을 만듭니다. ‘말’을 놓고 벌이는 광란의 파티, ‘말’이 곧 ‘허상’이라는 걸 깨닫기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곤 또다시 반복합니다.


‘말’은 ‘말’뿐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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