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몇 달 전, 딸아이가 등산화를 보내왔습니다. 히말라야 정상은 아니어도 베이스캠프 정도는 올라줘야 할 것 같은 제겐 딱히 소용이 닿지 않는 등산화입니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그냥 신발장에 넣어 둡니다.
집사람과 딸이 아들만 있는 어머니들의 로망이라는 동반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은 출장과 여행으로 두 차례 유럽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딸아이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숙박예약부터 여행일정 모든 걸 딸아이에게 위임한 상태입니다. 어느새 아이들의 결정에 의지할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대견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합니다.
모녀의 여행 일정인 10월 말에 맞춰 지리산을 계획합니다. 성삼재에서 시작해 체력 닿는 데까지 가보려는, 그러나 목표는 천왕봉 지나 중산리 하산입니다. 표를 예약하려고 검색하다 22일 예약 가능한 표가 있습니다. 금요일 막차에 자리가 남아있다니 횡재했다고 생각하며 일정을 당겨 표를 예약합니다. 며칠을 기분 좋은 설렘으로 보냅니다. 금요일 퇴근길에 김밥 세줄, 컵라면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을 삽니다. 배낭을 꾸린 뒤 저녁식사와 샤워를 끝내고 딸아이가 보낸 등산화 앞에 섭니다. 고민하다 발을 넣습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성삼재행 막차에 오릅니다. 제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습니다. 불안함이 몰려옵니다. 표를 확인해 보니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던 일이 실제 일어납니다. 22일이 아니라 23일입니다. 횡재가 아니라 흉재였습니다. 기사님께 부탁하니 문 앞 보조의자를 권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에 앉습니다. 출발하고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걸 후회합니다. 더 후회스러운 건 동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느꼈던 발목 통증입니다. 끈을 느슨하게 했지만, 신고 있는 상태만으로도 압박을 느낍니다. 직각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발목 통증에 네 시간을 시달립니다.
새벽 3시가 조금 못 돼 성삼재에 도착합니다. 굳은 허리를 다독이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고도가 낮아서인지 생각만큼 날이 차지는 않습니다. 야간 산행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가 손 닿을 거리에 있는 밤하늘입니다. 촘촘히 떠다니던 숨 막히는 별빛이 발목 통증에 밀려 흩어집니다. 신발 끈을 여러 차례 다시 묶으며 조절해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통증으로 인해 걸음마저 흩어져 연화천을 3km 남겨 놓고는 정상 산행이 불가능해집니다. 힘겹게 연화천에 도착해 아침식사와 물병에 숨겨온 막걸리를 몰래 마십니다. 산행이 주는 즐거움의 8할은 막걸리입니다. 그걸 못하게 막는 국립공원공단은 각성해야 합니다. “각 1병은 허용하라!”
벽소령을 향하는 발걸음이 심상치 않습니다. 결국 삼각고지에서 고민하다 음정으로의 하산을 결정합니다. 지난가을, 집사람과 딸아이와 걸었던 음정까지 6.6km가 정말 멀게 느껴집니다. 중산리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도전해야겠습니다. 근력도 세월엔 어쩌지 못하는 것인지 서글픈 산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