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목숨을 걸다!

역사 이야기

by 오세일

강력한 패권국이었던 진(晉)나라는 춘추시대 후반기에 이르러 한(韓), 위(魏), 조(趙), 지(知), 중행(中行), 범(范)씨의 여섯 가문에 권력이 분산됩니다. 군주의 권한을 넘어선 이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려 합니다.


기원전 497년, 중행씨와 범씨가 연합해 조씨를 공격합니다. 조씨의 종주 조양이 본거지인 진양성으로 달아나 항전합니다. 한, 위, 지씨가 결탁해 중행씨와 범씨를 몰아내고 영지를 나누어 갖습니다. 네 가문은 군주의 직영지보다 더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기원전 475년, 진출공이 군위에 오릅니다. 그해에 조양이 죽고 조무휼이 종주의 자리를 잇습니다. 지씨의 종주인 지요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나 욕심이 많고 인덕이 부족합니다. 지요가 조무휼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 두 가문은 원수가 됩니다. 진출공이 외세를 이용해 이들 네 가문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역습을 받아 달아납니다. 지요가 진애공을 군위에 올리고 국권을 장악합니다. 지요는 나라를 독차지하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기원전 455년, 지씨가 조씨를 공격합니다. 조씨 땅을 나눈다는 조건으로 한씨와 위씨를 끌어들입니다. 세 가문의 공격을 받게 된 조씨는 또다시 진양성으로 달아나 항전합니다. 일 년을 버텼으나 삼가의 수공을 받은 조씨는 그 끝이 보이는 듯합니다. 절명의 순간에 조씨의 가신인 장맹담이 반전을 시도합니다. 장맹담은 지씨와 한씨, 위씨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한씨와 위씨가 이 싸움에 동참하고 있는 건 땅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지씨의 위세에 눌린 탓입니다. 장맹담이 한씨의 종주 한호를 만나 조씨가 망하면 다음 차례는 한씨와 위씨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차라리 지씨를 몰아내고 지씨의 땅을 분할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도 주지시킵니다. 한호의 마음이 움직였고, 가신을 보내 위씨의 종주 위구를 설득합니다. 한호와 위구는 장맹담과 만나 지씨를 공격하기로 맹세하고 돌아갑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한씨, 위씨가 지씨 쪽으로 물길을 돌리고 물에 잠긴 지씨의 군영을 공격합니다. 지씨의 가신인 예양이 뗏목을 타고와 지요를 구해 진(秦)나라로 달아나려다 조씨에게 잡힙니다. 조무휼이 직접 조요를 참하고, 지요의 두개골로 요강을 만들어 오랜 세월 쌓인 원한을 앙갚음합니다.


기원전 453년, 한, 위, 조씨가 진나라를 나누어 가집니다. 진나라를 분할해 삼국이 섰기 때문에 한, 위, 조를 일러 삼진(三晉)이라고도 부르며 진(秦), 초, 제, 연과 함께 전국시대 칠웅이 됩니다. 기원전 770년, 주의 동천으로 시작된 춘추시대는 삼백여 년이라는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와 환경이 기다리는 전국시대로 이어집니다.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춘추식 인의의 전형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 짧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절명의 순간에 지요를 구한 예양은 진(秦)나라의 군대를 빌어 재기하려 했으나 지요가 조무휼에 잡혀 죽자 잠적합니다. 예양은 조무휼을 죽여 지요의 한을 풀고자 합니다. 자객이 된 예양이 조무휼의 집에 몰래 침입하나 사로잡히고 맙니다. 승자의 여유였는지 조무휼이 예양의 충의를 높이 사 살려 보냅니다. 조무휼의 명성만 높이게 된 예양에겐 오히려 죽음이 선물입니다. 산 가족을 위해 죽은 지요를 잊으라는 아내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하고 조무휼을 죽이기 위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기행을 시작합니다. 나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온몸에 옻칠하고, 목소리를 바꾸려고 많은 양의 숯을 먹습니다. 몸을 던져 복수한다는 칠신탄탄(漆身呑炭)이라는 고사가 만들어집니다. 자학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예양의 고행이 죽은 지요를 위한 것이든 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조무휼의 죽음이 목적이든 자학 자체가 목적이든 복수를 위한 두 번째 시도를 진행합니다.


다리 밑에 숨어 조무휼이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또다시 붙잡히는 신세가 됩니다. 조무휼이 묻습니다. “너는 지난날 범씨를 섬기다 범씨가 지씨에게 망할 때 스스로 지씨의 가신이 되었다. 옛 주인 범씨를 멸한 지씨는 섬겼으면서 왜 유독 지씨의 원수는 갚으려 하는가?” 예양이 답합니다.


“옛 주인 범씨는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대우했소. 그래서 나도 평범하게 범씨를 섬겼고, 범씨에 대한 의무도 평범함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지씨는 내게 각별하게 대했소. 그래서 나도 각별하게 지씨를 섬겼고, 망한 지씨에 대한 의무도 각별할 수밖에 없소. 어찌 범씨와 지씨가 같을 수 있겠소.”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사기의 예양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무휼이 칼을 풀어 예양에게 던지자 예양이 조무휼에게 겉옷을 벗어 달라 청합니다. 조무휼의 옷을 비수로 세 번 찌르고 난 뒤 죽어 지씨를 모시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몸에 칼을 꽂습니다. 이백 년의 세월이 더 지나 진왕(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연나라 자객 형가의 죽음이 전국시대의 마무리였다면, 예양의 주검에 번지는 핏자국과 함께 춘추시대라는 기나긴 여정도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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