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근로자의 날, 오래 꿈꾸던 당일 성중종주 실행 위해 등산버스 예약. 막차만 타고 다니다 늦은 귀경에 대비 처음으로 등산버스 이용하기로. 며칠, 좋은 기대감으로 보냄.
22:50, 사당 출발. 차에서는 잠 못 이루니 밤새고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음.
02:45, 성삼재에 등산객 내려놓은 버스는 중산리에서 대기하다 15시간 뒤에 등산객 싣고 귀경함. 버스에 짐이 있으니 18시까지는 중산리에 도착해야 함. 33.5km를 종주하든, 중간에 하산해 택시 타든.
03:00, 성삼재 출발. 가랑빈지 이슬빈지 조금씩 내림. 지난번 동네 뒷산 오르며 비 오는 밤에는 산길 훤하다고 입방정 떨어서일까? 한라산에 이어 연타석 비. 노고단 근처에서는 등산이 어려울 정도로 비가 내림. 우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발길 재촉. 1시간 만에 속옷은 물론 등산화까지 질퍽임.
06:35, 연하천 도착. 새벽녘, 고도가 높아지고 기온이 떨어져 몹시 춥고 손이 시림. 김밥 한 줄 먹고 물 보충해 7시 길을 나섬.
08:00, 벽소령 도착. 비는 여전히 내리고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출발. 저체온증이 우려될 정도로 여전히 추움.
10:05, 세석 도착. 중간 이후 빗줄기가 약해짐. 추위가 가시니 막걸리가 간절함. 남은 김밥 한 줄 먹고 25분 출발. 길을 걸으며 문득 든 생각. 혹시 내가 등산 영재인데 이를 인지하지 못한 부모님이 적성에 안 맞는 공부시켜 지금 이 모냥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기에 개발했다면 지금쯤 히말라야 14좌 완등하고 등산계의 원로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산에 진달래가 한창임. 올봄, 세 번째 진달래꽃. 동네 뒷산, 한라산 그리고 지리산에서.
11:35, 장터목 도착. 하루에 네 개 대피소를 다 보니 신기함. 세석을 출발하며 비는 오락가락하다 완전히 멎고 옷도 조금씩 말라감. 세석과 장터목 사이 주능선은 잘 조성된 정원 같아 지리산 주능선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그런데 다리에 피로가 쌓이니 이 능선의 기복도 버거움. 구름 사이로 잠깐씩 보이는 능선길은 여전히 환상임.
12:35, 천왕봉 도착. 장터목 이후 물을 끊음. 갈증이 극에 달하면 막걸리 맛도 극에 달함. 구름이 조금씩 걷히며 산과 어울린 풍경 보임. 비 온 탓인지 천왕봉이 한산. 최근 수년간 중산리에서 천왕봉 코스는 새벽 어두울 때만 오름. 밝은 날 내려가니 풍경이 새로움. 이렇게 가파르고 길었었나? 지친 다리로 인해 긴 하산길이 힘겨움. 이젠 정말 동네 뒷산만 올라야 할 듯. 아까 등산 영재 어쩌고저쩌고한 것 취소.
14:55, 중산리 도착. 종주한 기쁨도 잠시 아픈 무릎이 현실임. 주차장까지 1.5km는 덤. 택시라도 있으면 타고 싶은 심정. 다시는 이 짓 안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함. 산채비빔밥에 막걸리 한잔함.
이렇게 나의 오십을 보냄. 여전히 고난하지만, 다시 마주할 수 없을, 안녕! 나의 한 시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