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로마제국 멸망 후 상실한 옛 로마제국의 고토를 대부분 회복한 정복군주입니다. 황제가 고토수복전쟁에서 성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최후의 로마인이라고도 불리는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의 군사재능에 의지해서였습니다.
한니발을 상대로 처참한 패배를 이어가던 2차 포에니전쟁 말기에 20대의 나이로 혜성처럼 등장해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로마로 가져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갈리아를 정복하고 루비콘강을 건너 그리스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진 폼페이우스파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정 로마의 기초를 만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비견되는 벨리사리우스는 명장입니다.
혈통도 출생 연도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게르만의 한 부족으로 50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해 짧은 시간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만큼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530년,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다라전투에서 두 배나 많은 적군을 격파하고 승리합니다. 533년, 1만 5천의 병력으로 북아프리카 반달왕국을 상대로 두 차례 승리를 거두고 서로마제국 쇠퇴기에 소실했던 북아프리카를 수복합니다. 535년, 동고트족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탈리아에 파병돼 수년 만에 이탈리아를 동로마제국의 영토로 만듭니다.
마케도니아의 빈농 출신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군인이었던 외숙의 양자가 되면서 인생이 바뀝니다. 외숙이 훗날 황제가 되고 황위를 이어받는 행운을 얻습니다. 황제는 군사적 성공으로 명망이 높아진 벨리사리우스가 혹시라도 반역하지 않을까 의심합니다. 선조와 이순신 장군과의 관계와 비슷한 것 같은데 대신 황제는 대제라고 불릴만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황제의 지원은 언제나 빈약합니다. 그런데도 벨리사리우스는 단기간에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냅니다.
두 사내에게는 각각 테오도라와 안토니나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인 두 여인은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매춘하던 여인들입니다. 황제는 천한 여인과의 금혼령을 폐지하면서까지 테오도라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위에 오르자 당연히 그녀는 황후가 됩니다. 테오도라는 권력욕도 강해 동로마에는 두 명의 황제가 있다는 비아냥까지 듣게 합니다. 결혼 후에 테오도라는 황제를 위해 정조를 지키지만 안토니나는 죽을 때까지 방탕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