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조선통감부가 일본에 저항하는 애국지사 탄압을 목적으로 1908년에 신축 건립한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 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 변경)의 1호 사형수가 있습니다.
대한제국 말기의 항일 의병장이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1855년 경북 선산(현재 구미시)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유학을 바탕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유림이었습니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정규군이 해체되자 경북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해 경북, 충북, 강원 일대에서 일제와 싸웁니다.
1907년 11월, 13도 창의군이 양주에 집결해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합니다. 1908년 1월, 군사장을 맡은 허위 선생은 선봉대 3백 명을 이끌고 오늘날 왕산로(호를 딴 지명)까지 진격하나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에 막혀 실패합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낙향하자 선생이 이어 총대장이 됩니다. 이후 의병들은 정규전의 한계를 깨닫고 서울진공작전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합니다.
13도창의군 해체 후 허위는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십여 차례 교전하며 의병활동을 하다 1908년 6월 11일 일제에 붙잡혀 그해 10월 1일, 54세의 나이로 사형당합니다.
의병의 주동자와 대장이 누구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선생이 답합니다. “義兵의 주동자는 이토 히로부미이고 대장은 바로 나다.”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이토가 아니면 누가 주동자이겠느냐!”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너희는 한결같이 교활한 왜적의 주구(走狗)이고 나는 대한국의 당당한 의병장이니 너희들과 변론하지 않겠다. 더 이상 묻지 마라.”
허위를 심문하던 헌병사령관 아카시 겐지로는 허위의 깊은 인품과 식견에 감복해 국사(國士)라며 존경했다고 합니다.
지인의 블로그를 읽다 우연히 알게 된 독립지사입니다. 참으로 귀한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귀한 만큼 귀한 그대로 다음 세대에 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