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진(晉)나라를 삼분하고 독립한 지 50년이 지나 기원전 403년, 한·위·조의 맹주인 한건·위사·조적은 제후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주왕실의 명분상의 권위를 이용합니다. 주위열왕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공’ 다음 작위인 ‘후’를 하사받습니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라 한경후, 위문후, 조열후가 됩니다. 이로부터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전국칠웅인 진(秦), 제, 초, 연나라와 합종연횡하며 기나긴 항쟁을 시작합니다.
전국시대의 첫문은 위문후가 엽니다. 삼고초려도 마다하지 않은 인재 등용으로 전국시대의 시작을 자신의 시대로 만듭니다. 귀를 열어 신하들의 싫은 소리도 외면하지 않고, 말단 관리와의 약속도 저버리지 않는 전형적인 노력형 현군입니다.
위문후는 조나라와 한나라에 인접한 업이라는 곳에 서문표를 발탁해 태수로 임명합니다. 업 땅에서 벌어진 사건은 누구나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무속인이 고을 유지, 관리와 결탁해 홍수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처녀를 뽑아 하백에게 시집보낸다며 백성들을 갈취하고 괴롭힙니다. 서문표가 기지를 발휘해 주모자들을 차례로 강물에 던짐으로써 오랜 폐단을 일거에 척결합니다. 물길을 나누는 관개수로 사업을 벌여 홍수를 막고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업땅의 백성들은 풍요로워집니다.
‘귀신의 일로 사람의 일을 재단하는 자가 있다면 귀신으로 취급할 것’
서문표가 무속인과 결탁해 백성을 괴롭힌 무리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종교에 대한 서문표의 명쾌한 정의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중국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어떻게 존립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이 된다는 자료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권력자라 할지라도 종교의 명분을 정치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이천사백 년 전의 일이라는 걸 고려할 때 시대를 뛰어넘은 그의 확신과 신념이 놀랍습니다. 시대가 강요하는 보편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신념을 실행한 서문표의 일화는 시대를 넘어 지혜의 정점이 어디인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