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조건

역사 이야기

by 오세일

#1

기원전 480년,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맹과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도시를 점령 당해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한 아테네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습니다. 이때 아테네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으면 파괴된 도시를 재건해 주고, 그리스의 주인이 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페르시아로부터 받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는 혹시라도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걱정돼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나섭니다. 스파르타 식량원조의 저의를 알게 된 아테네의 답변입니다.


“재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스파르타의 생각은 진정한 가치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니 굳이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아테네의 진정한 정신인 정의와 용기는 보지 못하고 단지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으로 아테네를 적들과 싸우게 하겠다는 스파르타의 발상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자유와 바꿀 수 있는 재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테네는 그리스를 짓밟고 신전을 더럽힌 페르시아와 끝까지 싸울 것이다.”


#2

삼니움족을 제압해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는 기원전 283년, 스파르타의 식민지로 출발한 남단의 도시국가 타렌툼을 공략해 이탈리아반도 전체 패권을 장악하려 합니다. 스파르타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싸움을 싫어했던 타렌툼 시민들은 자국의 방어를 용병을 고용해 해결하려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최고의 전략가로 명성을 날리던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왕인 피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전쟁 자체를 즐겼던 피로스가 타렌툼의 용병으로 로마와의 전쟁을 대행합니다. 피로스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란 명성대로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고 조건부 강화를 제안합니다. 피로스의 전투력에 두려움을 느낀 로마가 제안을 수용하려 합니다. 그때 노환으로 시력까지 잃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에 나타나 ‘피로스를 벌하지 않고 강화하면 세상은 로마를 우습게 여길 것이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로스와 맞서게 될 것’이라는 연설로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로마가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피로스가 이탈리아에 버티고 있는 한 로마는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결의도 함께 전달합니다.


로마와 피로스가 강화를 조율하는 과정에 로마군 포로의 석방 문제를 논의합니다. 로마가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려고 하자 피로스는 장사를 위해 이탈리아에 온 것이 아니라며 조건 없이 600명의 포로를 석방합니다. 로마는 오히려 강화가 성립되지 않으면 포로들을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결국 로마의 거절로 강화가 무산되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 가족과 재회했던 600명의 로마군 포로들은, 돌아가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는 로마 원로원의 명령이 있기는 했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타렌툼으로 돌아가 다시 포로가 됩니다.


이때 피로스의 시의(侍醫)가 피로스를 죽여주면 얼마를 주겠느냐며 로마에 흥정해 옵니다. 간사한 음모를 용납할 수 없었던 로마는 피로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의 시의가 보낸 편지를 동봉합니다. 이 편지를 보내는 것은 로마가 암살이라는 비열한 방법으로 전쟁에서 이겼다는 누명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호의에 감동한 피로스가 다시 로마군 포로를 석방하자 로마는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야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3

기원전 218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합니다. 개전 초기 연전연패하던 로마는 병력, 식량, 자금 등 모든 게 부족합니다. 이때 동맹국인 나폴리가 25개의 금화 항아리를 보내옵니다. 로마는 하나만 감사의 표시로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냅니다. 시라쿠사가 밀을 보내오자 로마는 밀값을 지불합니다.


#4

춘추시대, 장강을 기반으로 하는 초나라는 황하를 기반으로 하는 중원국가들로부터 ‘남만(南蠻)’이라 불리며 멸시받는 처지입니다. 중원국가들은 왕호를 사용하지 않으며 상징적이나마 주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체제를 유지합니다. 오직 초만이 왕호를 사용하며 주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기원전 606년, 절영회의 주인공인 초나라 장왕이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주나라 국경 부근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무력시위를 합니다. 초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주가 천자의 권위를 누리는 것이 못마땅하면서도 수백 년 전통에 대한 열등감도 갖고 있습니다. 주는 왕손 만을 파견해 초장왕을 만나게 합니다.


주나라에 신물인 구정이 있습니다. 구정은 하나라 시조 우왕이 중국 구주의 청동을 모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홉 개의 솥입니다. 구정이 주에 있다는 것은 주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초장왕이 만에게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습니다. 구정에 대한 관심은 주의 권위에 대한 관심이고, 초가 주를 대신하겠다는 시위입니다. 상징적 천자인 주일지라도 수백 년 전통에서 나오는 권위는 무력을 넘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만이 답합니다. “정의 크기와 무게는 덕(德)에 있지 정 자체에 있는 게 아닙니다.” 초장왕이 호기를 부리며 말합니다. “덕 같은 건 모르오. 다만 초나라의 부러진 창끝만 모아도 구정 따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소.” 만이 다시 답합니다. “하나라 걸왕이 무도하자 구정은 상나라로 옮겨졌고, 상나라 주왕이 무도하자 구정은 다시 주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천자가 덕이 있으면 그 정은 작아도 무거우며, 천자가 덕을 잃으면 그 정이 아무리 커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모든 것이 천명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왕께서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상대를 떠보아 약점을 잡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문정경중(問鼎輕重, 정의 경중을 묻다)’의 고사입니다. 무안해진 초장왕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갑니다.


#5

한일합방을 적극 지지했고 문화통치의 이론을 제공한 ‘호소이 하지메’라는 왜구 학자가 1921년에 썼다는 ‘붕당, 사화의 검토’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답니다. “조선인에겐 특이한 더러운 피가 흐른다. 희대의 영웅도 붕당의 악폐는 근절시키기가 어렵다. 그 피를 어쩔 것인가? 1934년에 죽었다는 이자가 저승에서 요즘의 대한민국을 보며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고 웃고 있지는 않을까요?


Pax Romana를 흉내 내던 나라가 국제 일진이 되어 삥 뜯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분단국가라는 약점이 호구로 보였나 봅니다. 외환이 닥치면 내부결속이 통상적입니다. 다양성의 힘을 인정하더라도 이때만큼은 통일된 목소리에서 국가의 힘이 더해지고 협상력이 생깁니다.


패권은 희생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희생이 결국 국익이 됩니다. 패권을 추구하는 나라의 심모원려입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10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하는 그 나라의 끝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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