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세일 Jan 10. 2023

한 여인이 있습니다.

역사 이야기

기원전 600년대를 살다 간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많은 분쟁의 원인이 된 여인, 그로 인해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 묵언(默言)으로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규씨부인, 식부인, 문부인으로 불렸으며 도화부인이라 하여 복숭아꽃에 비유되는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합니다.     

약소국인 진(陳)나라 군주의 딸로 태어나 식(息)나라 군주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식나라가 비록 소국이었지만, 한 군주의 부인으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그녀의 미모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식부인이 친정인 진나라로 가는 길에 형부의 나라인 채나라에 들립니다. 채후가 처재의 미모에 반해 희롱합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식부인이 귀국해 식후에게 알립니다. 식과 채는 모두 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들입니다. 앙심을 품은 식후가 초문왕을 충동질해 채를 공격하게 합니다. 채는 당시 패권국인 제나라 제환공과의 혼인관계를 믿고 초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초문왕의 미움을 사고 있습니다. 채를 공격해 채후를 사로잡은 초문왕이 그를 삶아 죽이려 합니다. 채후가 끔찍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초나라의 강직한 신하 육권 덕분입니다. 육권이 왕에게 채후를 죽이면 중원 국가의 반감을 살 수 있으니 그를 살려 보내 덕을 보이라고 충언합니다. 왕이 듣지 않자 육권이 칼을 뽑아 왕을 위협합니다. “왕과 함께 죽을지언정 왕이 모든 나라의 멸시를 받게 할 순 없습니다.” 왕이 놀라 채후를 살려줍니다. 육권이 죽음으로써 왕을 위협한 죄를 씻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왕이 육권의 충심을 칭찬하지만 육권은 한쪽 발을 잘라 왕에 대한 무례를 경계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채후는 식후에 대한 원한에 사무칩니다. 채후는 왕에게 식부인의 미모를 설명하고 왕의 권한으로 뺏으라며 충동질합니다. 왕이 식나라를 방문해 식부인을 봅니다. 미모에 눈이 뒤집힌 왕이 식나라를 빼앗고 식부인을 취합니다. 식후에겐 조상 모실 작은 식읍만을 남겨줍니다.     


초문왕이 식부인을 총애해 문부인이라고 부르며 웅간, 웅운 두 아들을 낳습니다. 문부인은 웃지도, 말하지도 않으며 식후에 대한 절개를 지킵니다. 왕이 문부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채후를 잡아다 죽을 때까지 귀국시키지 않습니다.     


문부인의 두 아들 중 둘째 웅운이 첫째 웅간보다 뛰어납니다. 초문왕이 재위 13년에 죽고 장자인 웅간이 왕위를 잇습니다. 웅간은 왕으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해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웅운이 웅간을 죽이고 즉위하여 초성왕이 됩니다. 초성왕의 숙부인 자원이 재상에 해당하는 영윤 벼슬에 있습니다. 자원이 형수인 문부인을 마음에 두고 왕위를 찬탈하려 합니다. 자원이 왕을 업신여기며 선을 넘다 오히려 왕에게 제거당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춘추시대에 이름을 남긴 여인들은 치정 아니면 혈육에게 권좌를 전하려는 골육상쟁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 사악하게 묘사됩니다. 식부인은 수많은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선하게 묘사된 유일한 여인일 듯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될수록 세속에 대한 환멸로 궁궐 깊숙한 곳으로 은거했다고 합니다.     


북방에 가인 있어 홀로 아름다워라

한 번 돌아봄에 성이 기울고 다시 돌아봄에 나라 기우네

성이 기울고 나라가 기우는 걸 어찌 모르리

가인 다시 얻기 어려운 것을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한무제 때 이연년이라는 사람이 아름다운 누이를 천거하기 위해 황제 앞에서 불렀다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출처가 되는 시입니다. 나라를 잃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한이 되어 일찍 죽었다는 식후가 시대를 뛰어넘어 마지막에 부른 노래가 있다면 이 노래가 아니었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혼군(昏君)이 만든 참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