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기원전 1600년경, 하(夏)나라 걸왕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국인 상(商)나라 탕왕이 봉기해 하를 멸합니다. 다시 600여 년이 지나 상나라도 주왕 대에 이르러 정치가 어지러워집니다. 하걸왕에겐 말희가 있었고, 상주왕에겐 달기가 있습니다. 말희와 달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경국지색이지요.
상나라의 제후국인 주(周)나라 군주 희발(주무왕)은 선대인 희창(주문왕) 때부터 이어온 상과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주에는 뛰어난 두 인물이 있어 희발을 보좌합니다. 우리가 강태공이라 부르는 강여상과 희발의 동생인 희단(주공 단)이 그들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희단은 수백 년 후, 노나라에서 태어나는 공자의 role model이며 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사람입니다.
상주왕과 달기의 학정은 극에 달해 충언하는 숙부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둡니다.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선 실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상이 망하자 조선으로 가 기자조선을 세운다고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상주왕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일전의 시기를 고심하던 희발은 주나라를 지지하는 제후국과 함께 목야로 진군합니다. 그런데 이 진군을 막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치니 인이 아니고, 선왕의 장례가 끝나기 전이니 효가 아니라며 희발의 진군을 방해합니다. 이들이 바로 성삼문의 시조 ‘절의가’의 주인공인 백이와 숙제입니다.
상주왕 또한 주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합니다. 상은 70만, 주는 4만5천이라 전해지는데 상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관도대전과, 비수대전이 그렇듯이 전쟁의 승패가 군사의 다소에만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목야전투, 주의 입장에서 힘겨운 싸움이 예상되었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일방적으로 진행됩니다. 600년 축적된 상의 전통과 전통에서 발휘되어야 할 잠재적 역량도 폭군 아래에선 무용지물이 됩니다.
건장한 체격, 잘생긴 외모, 총명한데다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 초기의 상주왕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당대의 엄친아였던 그는 너무 자만했을까요? 향락과 여색을 좋아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고사와 함께 요순시대에 대비되는 걸주시대의 주인공이 된 상주왕, 창업의 명분을 위해 전 왕조의 정치를 과하게 매도한다 해도 600년 지속된 나라를 잃었으니 이 또한 감수해야 할 몫이겠지요.
기원전 1122년 혹은 1046년 그 어디쯤에서,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섰습니다. 주무왕은 일족과 공신을 제후에 봉하는 봉건제를 실시합니다. 주공 단도 노나라를 봉국으로 받아 노의 시조가 됩니다. 그러나 주공 단은 아들 백금만 노로 보내고 자신은 주의 안정을 위해 헌신합니다. 노로 부임하는 아들에게 했다는 주공 단의 말이 아름답습니다. 이른바 토포악발(吐哺握髮)의 고사입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이니 천한신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씩 머리털을 움켜잡고, 한 번 밥 먹을 때 세 번 입안의 밥을 뱉어내고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면서도 오히려 천하의 어진 인재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나라가 안정되기도 전에 주무왕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어린 주성왕이 즉위했고 주공 단이 섭정에 올라 정치를 합니다. 주공 단은 봉건제를 확립하고 예악과 법도를 제정해 주의 기초를 다지고 안정시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를 고운 시각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공 단이 어린 왕을 죽이고 권좌를 차지할 거라 수군거립니다. 주공 단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상주왕의 아들인 무경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3년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주공 단은 반란을 진압하고 주나라를 안정시킵니다. 어린 왕이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며 왕 대신 자신을 벌할 것을 빌고 축원문을 작성해 부고에 간직합니다. 또한 상나라 땅을 경영하기 위해 낙양에 성주(成周)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상나라 유민을 옮겨 황무지를 개간합니다.
섭정한지 7년, 왕이 장성하자 주공 단은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에 섭니다. 왕의 친정이 시작되자 주공 단을 모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왕은 여전히 나라를 위해 애쓰는 주공 단의 모든 직위를 박탈합니다. 뒤늦게 부고에 있던, 병중의 자신을 대신해 죽게 해 달라는 주공 단의 축원문을 본 왕은 주공 단의 충심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다시 불러들입니다. 복귀한 주공 단은 관제를 정비해 질서를 바로잡고 왕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마침내 주공 단에게도 죽음이 찾아옵니다.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안 그가 유언을 남깁니다.
“내 주검을 성주에 매장하여 내가 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음을 명시하라.”
오직 주의 신하로서만 살았고 죽어서도 그 본분을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 세상에 강변하고자 했던 건 “단 한 번도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주성왕은 그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주공 단을 필(畢, 주의 도읍인 풍읍 근방으로 주문왕의 분묘가 있는 땅)에 매장하여 불초한 내가 그를 신하로 거느리지 않았음을 밝혀라.”
주성왕에게 있어서 주공 단은 성장기 내내 거대한 산과 같은 압박으로 존재했던,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왕좌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내줘야 했을, 존재 자체가 두려움이면서도 위태로운 권좌를 위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모든 우려를 기우로 만들고 권력을 넘겨줬을 때 왕은 가슴 졸이며 살아온 그 세월을 향해 권력을 휘두릅니다. 그리고 그가 영면합니다. 주공 단에 대한 주성왕의 마지막 선택은 진심이었겠지요. 결국 둘의 관계는 아름다운 고사로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오직 주의 신하로서 주를 위해 치열하게 살다 간 주공 단, 한 발 내딛기만 해도 오를 수 있었던 권좌를 두고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이로부터 400년 후인 기원전 7C, 그리스 스파르타에 한 사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도 왕이었고 형도 왕이었습니다. 다른 건 왕이었던 형의 소생이 없어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11대손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르타的인 것의 창시자인 리쿠르고스라는 사람입니다. 왕이 된 리쿠르고스는 전 왕비가 선왕의 유복자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먼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사내아이를 낳으면 왕위를 잇게 하고, 나는 신하의 자리에서 섭정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전 왕비로부터 아이를 유산시킬 테니 자신과 결혼해 왕과 왕비의 자리에 오르자는 은밀한 제안이 옵니다. 리쿠르고스는 흔쾌히 승낙하며 낙태는 몸을 상하게 하니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전합니다. 왕비가 아들을 낳았고 은밀히 리쿠르고스에게 보냅니다. 마침 그는 대신들과 만찬 중에 있습니다. 아이를 받아든 리쿠르고스는 만찬장에 있던 대신들을 향해 외칩니다.
“스파르타여, 그대들의 왕이 탄생하였노라!”.
명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현대사를 어지럽힌 전직 대통령들, 권좌에 오르기 위해 또는 권좌 유지를 위해 수많은 국민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포기하지 않는 명분이 있습니다. 훗날 역사의 평가를 운운하면서까지. 그들은 단 한 번도 반문해 보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선택이 혹시라도 개인적인 권력욕에서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