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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일 Feb 06. 2023

영웅과 간웅 사이

역사 이야기

춘추시대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제후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환공의 나라 정(鄭)입니다. 정환공 우는 주여왕의 막내아들이자 주선왕의 배다른 아우이며 주유왕의 숙부뻘이 되는 주나라 왕실 출신으로 주선왕 22년(기원전 806년)에 정에 봉해져 제후가 됩니다. 정환공은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신임을 얻습니다. 정환공이 주유왕을 보좌하다 견융에게 죽고 아들이 군위에 올라 정무공이 됩니다. 기원전 744년, 정무공의 뒤를 이어 정장공이 군위를 잇습니다.     


종실인 주나라와 정나라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주평왕은 태자인 예보를 정에 보내 사태를 무마하려 합니다. 정장공도 세자 홀을 주나라에 보내 사실상 서로 인질을 교환합니다. 이 사건은 종실인 주나라와 제후국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됩니다. 

    

기원전 720년, 왕위 51년에 주평왕이 죽고 정에 볼모로 있던 예보가 왕위 계승을 위해 돌아오지만, 곧 죽습니다. 아들이 즉위하여 주환왕이 됩니다. 왕은 부친을 볼모로 삼았던 정장공을 미워합니다. 정장공이 송나라를 치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송을 친다.”며 왕명을 참칭합니다. 주환왕은 정장공의 처사에 분노합니다. 주 체제하에서의 제후국은 3년마다 한 번씩 입조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어기면 반역으로 간주합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환왕은 수년 동안 왕실에 입조하지 않은 정장공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합니다. 왕은 채(蔡), 위(衛), 진(陳)에 정을 치기 위한 군사를 동원하라 명합니다. 상징적 권위일지라도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세 나라는 친정하는 왕을 돕기 위해 군사를 동원합니다. 

    

종실과 싸우게 된 정장공은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부담 속에서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군대를 동원합니다. 기원전 707년,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일개 제후국인 정나라 사이에 벌어진 수갈전투는 일방적으로 진행됩니다. 정은 나라의 명운을 걸고 싸우지만, 왕군은 애초에 세력이 약했고 세 나라 군대는 이겨야 한다는 동기가 없습니다. 정나라 장수 축담이 쏜 화살이 왕의 어깨에 꽂히자 정장공은 군사를 불러들이고 신하를 보내 왕에게 사죄합니다. 이 사건은 주평왕 때의 인질교환 사건과 함께 주가 더 이상 종가로서의 힘이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영웅과 간웅의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는 정장공은 주의 권위가 사라진 혼돈의 시기에 패권을 이룬 군주입니다. 정장공은 9백여 년이 지나 한나라 말기에 등장하는 조조와 닮아 있습니다. 정장공은 군위 초기에 영토확장의 뜻을 밝히고 어느 나라를 먼저 칠 것인가를 신하들에게 물은 일이 있었습니다. 대신 관기사가 호국을 치자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호국은 정장공 사위의 나라입니다. 정장공은 의롭지 못하다며 관기사의 목을 벱니다. 소식을 들은 호국은 감동했고 정에 대해 방비하지 않습니다. 정장공이 급습해 호국을 병합합니다.     


기원후 198년, 조조가 원술의 수춘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입니다. 군량을 담당하던 왕후라는 관리가 식량이 부족하다고 보고하자 조조는 작은 말을 써서 배급하라고 명령합니다. 배급량이 줄어들자 당연히 군사들 사이에 불만이 고조됩니다. 식량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왕후의 목을 베 불만을 잠재운 조조는 군사들을 독려해 수춘성을 함락시킵니다.     


춘추의 초기는 한나라 말 영웅들의 시대와 정치적 상황이 유사합니다. 주를 대신해 몰락해가는 한이 있었고, 제후국 대신 패권을 노리는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난세를 살아간 두 간웅의 행보가 닮아 있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기원전 701년, 정장공이 군위 42년에 죽은 후 정나라는 패권을 잃습니다. 남쪽의 강자로 부상한 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나야 할 관문에 위치한 정나라는 초, 초의 중원 진출을 막으려는 중원국가 사이에서 끝없는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초를 선택하면 진(晉)의 군사가, 진을 선택하면 초의 군사가 도읍인 형양성 아래 진을 치는 역사가 반복됩니다. 결국 정나라는 진이 오면 진과, 초가 오면 초와 화친을 맺는 성하지맹(城下之盟)의 굴욕적인 역사를 이어갑니다. 춘추오패에 포함하지 않지만, 약소국 정을 패권국으로 만든 정환공은 간웅이면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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