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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Dec 13. 2020

쓰레기를 훔치다.

3. 훔치다.

오이도역은 4호선의 종착역이다. 좌석은 텅텅 비어, 채워질 준비를 했다. 종착역에서 소명은 방향을 고민하지 않았다. 어떤 것에 오르든, 더 나은 곳으로 소명을 데려다줄 것이었다. 소명은 출입구에 가까운 쪽에 앉았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메모집을 꺼냈다. 무연은 연말이 되면 곧 다가올 해를 담기 위해 노트를 샀다. 아무것이나 사지 않고, 세상은 다 뒤져 그에게 꼭 맞는 노트를 찾아냈다. 새해의 몇 개월이 지날 때까지, 노트를 찾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의 해는 마치 여름에 시작한다는 듯이, 일기나 메모 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을 무연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한 번은 소명이 물었다. 

"노트에 왜 집착해? 내용이 중요한 거 아닌가?"

무연은 이리저리 뒤집어보던 노트를 다시 내려놓고, 그 옆에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내용도 중요하지. 나는 꼭 맞는 게 필요해."

소명은 자신이 골라 들은 다이어리를 내려다봤다. 평범하고,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연이 덧붙였다.

"내년에 딱 어울리는 노트를 사고 싶어."

"아직 내년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무연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가버렸다. 소명은 깔끔하고, 남들의 것과 비슷한 다이어리를 도로 내려놓았다. 다음 가게에서 고르자고 생각했다. 무연이 고를 것이 궁금했다.


'andus' 표지를 넘기자 익숙한 문구가 눈에 들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의 정수를 마시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들은 모두 버리고. 삶이 다했을 때, 그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으리라.' 소명과 무연, 주희가 어릴 적에 함께 본,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때 이후로 무연은 자신의 노트 제일 앞 장에 그 문장을 적어 두었다. 더 자란 후의 우리는 소로의 시를 제대로 읽어보고, 당시 영화의 번역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무연은 처음 그대로, 또 한글로 문장을 적었다. 소명도 그 문장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훑는 동안, 소명의 진심은 숲으로 달려갔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은 소명에게 아주 귀중한 것이었다. 소명은 메모집 위에 쓰인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무연에게는 어땠을까? 소명은 곧 노트를 닫았다. 호기롭게 펼쳤지만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았다. 전철이 덜컹거리며 그를 어딘가로 내려놓을 때까지, 소명은 메모집을 꽉 쥐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역에서 나와 몇 분 걷자, 방금 전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거무스름 해 졌다. 곧이어 빗방울이 두둑 거리며 떨어졌다. 소명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흙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메모집이 젖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소명의 원룸이 있는 건물 입구에, 종이 두 어장이 비를 맞으며 달라붙어 있었다. 4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종이는 한 두장씩 늘어갔다. 소명이 원룸 앞에 도착했을 때, 꽤 많은 양의 종이 뭉치가 문 앞에 흩날리고 있었다. 관리인이 엄격한 건물인데 이상했다. 소명은 열쇠로 방문을 열고, 2.5평짜리의 안정을 만끽했다. 소명은 드라이어기로 메모집을 훑고, 작은 빨래건조대에 널어두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주희의 얼굴과 뒤이어 아버지의 얼굴, 어머니의 얼굴이 마음에 엉켜왔다. 생각의 그물은 퍼지고 퍼지더니 빛의 속도로 오래된 집에 가 닿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그때, 문 밖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문을 쾅 닫는 소리. 순간 너덜거리던 종이뭉치들이 떠올랐다. 문을 열어볼까 하고 소명은 잠시 고민했다. 소명의 청감각은 얇은 문 너머의 종이뭉치들을 향해 있었다. 옆방 사람인 것 같았다. 복도 왼쪽의 끝 방에 사는 이웃. 굵은 펌을 한 머리가 허리까지 닿는 무척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소리의 원인이 가끔 인사하던 이웃 사람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소명에게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불현듯 무슨 위험한 일이 생겼는가 하는 걱정스러움이 떠올랐다. 소명은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을 살짝 열었다. 아까보다 몇 배는 많은 양의 종이뭉치들이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명은 그중 한 뭉치를 집어 들었다. 원고였다. 네모의 가지런한 공간에 까만 글씨가 빼곡했다. 비가 땅에 몸뚱이를 처박는 우두두-하는 소리 사이로 급한 발걸음 소리가 섞였다. 복도 끝에서 이웃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젖어있었다. 파란 로브 카디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잠시 소명을, 그리고 소명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쳐다봤고, 빠르게 걸어왔다. 이웃 사람은 원고를 확 낚아채며 말했다.

"다 치울 거예요."

그리고는 소명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갔다. 소명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의 방문을 멀뚱히 쳐다봤다. 죄책감이 들었는데, 왜 인지 몰랐다. 그의 파란 로브가 얼룩의 잔상으로 남아 아른했다. 소명이 미처 시선을 거두기 전에 그는 문을 다시 열었다. 양 팔 가득 원고 뭉치를 들고서 나왔다. 소명과 눈이 마주친 그의 두 눈동자에는 불쾌함과 민망함이 서렸다가, 이내 소명을 지나쳤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왜 종이뭉치들이 드문드문 날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소명의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소명은 전기가 통한 것처럼 살짝 튀어올랐다. 핸드폰 화면에 문자 아이콘이 떠 있었다. 보나 마나 스팸일 것이다. 소명은 그것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요원의 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웃 사람을 따라 뛰어 내려갔다. 

"다 젖을 텐데!"

이웃 사람은 고개를 들고 소명을 쳐다봤다. 소명도 자신의 말이 멍청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그는 물속에 있는 사람 같지 않았던가. 게다가 소명도 비 속에 그냥 서 있었다. 분리수거장에 원고 뭉치를 버리려는 그를 막아선 채였다. 소명은 그의 손에 가득 들린 원고를 빼앗았다. 

"지금, 뭐 하는-!"

그가 소리쳤다.

"제, 제가 미쳤나 봐요."

소명은 연신 미쳤다고 하면서도, 원고의 주인을 뿌리치고 자취방으로 달렸다. 이웃사람은 소명의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방음 기능이 전혀 없는 원룸텔의 방방마다 사람들이 나와 무어라 욕을 했다. 그는 문에 대고 소리쳤다.

"이거, 절도인 거 알죠?!"

절도였다. 황당하고 나쁜 짓이었다. 소명은 마치 홀린 것처럼 원고를 탈탈 털어, 빨래건조대에 널었다. 이웃 사람은 어느새 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밖은 잠잠해졌다. 비에 젖은 채, 소명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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