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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Dec 20. 2020

쓰레기를 훔치다.

4. 여름 감기

 물에 빠진 꿈을 꾼 듯했다. 온몸이 축축했다. 소명은 등의 통증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침대는 놔두고, 맨바닥에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창문 밑, 빨래 건조대가 눈에 들어오자, 어제 있었던 일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소명은 책상 위의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7시 23분을 뜻하는 빨간 선들이 깜박깜박거렸다. 어제 저녁에 쓰러져서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것이다. 기절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 아니던가. 

침대를 붙잡고 일어난 소명이, 나란히 놓여있는 무연의 메모집과 낯선 원고를 빤히 쳐다봤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어제 하루가 흐린 얼룩 같았다. 비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소명의 정신이 잠시 떠나 있었던 걸까? 소명은 주섬주섬 카디건을 주워 입었다. 정성스럽게 말려놓은 원고를 집어 들고, 문을 열었다. 한번 젖었다 마른 종이의 바삭한 표면이 따뜻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일부러 외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원고의 주인이 관리인에게 항의했을까? 아니면 벌써 경찰에 신고했을지 몰랐다. 문 여는 소리가 크지 않도록 조심히 닫는데, 쪽지가 하나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돌려줘요. 좋은 말로 할 때.'

원고 속 글씨체였다. 아직 신고는 안 한 것 같았다. 옆 집으로 한 걸음 다가가자, 오렌지빛 센서등이 켜졌다. 소명은 약간 안심한 기분으로 옆 집의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자마자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왔다. 소명은 그가 안경을 쓴 것을 처음 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는 소명이 들고 있는 원고를 휙 가져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읽었어요?"

"네?"

소명은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잠시 버벅거리다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읽어볼 정신도 없었거니와 정신이 있었더라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안 봤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원고를 만지작거리면서, 한쪽 손으로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잉크 냄새가 났다. 과제물을 뽑기 위해 인쇄소에 가면 나는 냄새였다. 소명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뭔가 합의를..."

"어디 아파요?"

그의 왼쪽 눈썹이 씰룩였다. 

"아뇨."

소명은 자신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땀이 흥건하게 묻어 나왔다. 전혀 몰랐다. 오기 전에 거울이라도 볼 걸 그랬다. 홧홧해지는 얼굴을 뒤로 쓱 빼며, 소명은 소매로 땀을 닦았다. 

"감기 몸살? 집에 약 있는데."

그는 원고를 작은 탁자에 올려두었다. 바로 옆집인데도 소명의 방보다 약간 넓었다. 작은 탁상용 스탠드 하나가 미약한 흰 빛을 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 합의금이라던지... 요구할 게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소명은 땀을 연신 문질러 닦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명은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빨간 얼굴로 언제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허리 굽혀 사과를 할 때, 소명의 앞이 새하얘지더니 땅이 기울었다. 소명은 쓰러지기 전에 자신이 쓰러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곤 했다. 지금이 그랬다. 급히 뒤를 돌아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 소명이 방문을 열었다. 만취한 것처럼 사물들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빛이 눈을 통해 과하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소명의 시야에 흰 부분이 늘었다. 또 쓰러지겠다.


"얘 또 쓰러졌니?"

"어, 시험기간이라 그런가..."

어머니와 무연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좀 조용히 하자. 언니 좀 자게."

주희의 목소리도 들린다. 몸이 축축하고, 무겁다.

"무연이 너는 어떻게 알고 벌써 와 있어?"

"나 학원에 있는데 전화 와서는, 약 좀 사 오라고 하길래."

"소명 언니는 꼭 쓰러지기 바로 전에 전화하더라."

"아니 얘는, 전화할 정신 있으면 쓰러질 것 같다고 말을 하든지. 왜 약을 사 오라고 매번 그런다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약간 커진다. 어머니는 자주 쓰러지는 소명이 익숙하지도 않은지, 그때마다 한 껏 애틋해한다. 소명은 미안하면서도 고마우면서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어록 비밀번호 입력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는 숨이 찬 목소리로 대뜸 어머니를 다그친다.

"아니, 애를 잘 먹이기는 하는 거야?"

"아빠, 좀 조용히 해."

주희가 소명의 방 문을 닫고 간다. 이제 소명에게는 가족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린다.

"시험... 공부... 문에... 런가?... 좀... 지어 먹여야..."

소명은 여름 소나기가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감기몸살을 앓는다. 자신이 매우 귀중한 짐이 된 것 같다. 몇 번의 들썩이는 흰 빛과 혼란한 꿈을, 축축한 땀 속에 겪고 나면, 더 중요한 것을 얻는다. 무연이 사다 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서, 소명은 꼭 아픈 게 싫지만은 않다고, 배부른 소리를 하곤 한다.


문을 겨우 닫은 너머로 괜찮냐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무연인가. 어머니인가. 옆 집 여자인가. 아버지인가. 주희인가. 시선과 정신이 어딘가로 끌려 올라갔다. 소명은 이제 무연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쓰러져도 괜찮은 장소에 가서 쓰러질 뿐이었다. 무연의 번호도 없었다. 이제는 무연이 준 아이스크림이나 어머니의 걱정스러움 대신, 소명은 무릎을 끌어안아야 했다. 어떤 것은 다 괜찮아졌으며, 어떤 것은 평생 아플 것 같았다. 잊고 싶기도 했고, 잊고 산다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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