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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Dec 27. 2020

쓰레기를 훔치다.

5. 강우

 소명이 뛰쳐나간 날 밤에, 강우는 소명의 방 문을 두드렸다. 얼굴색이 안 좋았는데,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멀쩡히 걸어 들어 간 건가? 고민 끝에 강우는 소명 방의 문 손잡이에 종합감기약을 매달아 두고 돌아왔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빳빳한 원고지들이 무어라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소명은 이튿날 오후에 강우를 찾아왔다. 포장된 쿠키와 종합감기약을 내밀었다. 약을 두고 간 사람이 강우라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약이 줄지 않았기에 묻자, 소명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있다고 말했다. 

 “커피 한 잔 할래요?”

소명은 아무 대답도 없이 서 있었다. 강우가 갑작스럽게 던진 말을 이해하는 중인 듯했다. 

 “이거 혼자 먹기에는 많은데.”

강우는 소명이 건넨 쿠키 봉지를 들어 보였다.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상했다.


강우가 소명을 처음 본 것은 화중대학교 과제전에서였다. 당시 강우의 애인이 서양화과의 재학생이었고, 강우는 그의 성화에 못 이겨 과제전에 들렀다. 꽃다발을 쥐고,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소명이 있었다. 소명이 소명인 줄 알았던 것은, 소명이 ‘소명’이라는 자화상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캔버스 안에 들어찬 인물은 강우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완전히 똑같아서, 강우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과제전이라 함은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제출한 과제물을 발표하는 자리로, 수준이 높은 전시는 아닌 것 같았다. 강우는 조잡한 그림들에 오히려 발길이 붙잡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들의 작품에는 충동과 고민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담겨서,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솔직한 것은 동시에 꼭 매력적인 법이었다. 다음 학기에는 애인이 불러서가 아니라, 강우의 의지로 과제 전시를 보러 갔다. 소명의 작품은 없었다. 강우는 소명이 휴학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소명은 그 해 여름에 강우의 이웃으로 나타났다. 전에 봤을 때 보다 야위고 어두워 보였다. 종종 인사를 할 때마다 강우는 소명의 자화상을 그와 비교해 보았다. 두툼히 겹쳐진 페인트 물감과 실제 소명의 얼굴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골라냈다. 그러고 나면 무척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사람은 왜 변하는가 하는 물음이 따라왔다. 

과제 전시에 대한 강우의 말에 소명은 놀란 듯했다. 아니,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라 기분이 상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꽤 소름 끼치는 말을 한 것 같았다. 강우는 뒷목을 긁적이며 소명의 눈치를 살폈다. 

 “자화상이 작가랑 너무 똑같아서 기억에 남나 봐요.”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소명의 표정은 젖은 시멘트 반죽처럼 단단히 굳은 채였다. 

 “승희 오빠 여자 친구셨구나.”

침묵 끝에 소명이 입을 열었다. 강우는 조급해졌다. 이렇게 말이 없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강우가 하면 안 될 말을 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강우는 말을 고르는 데에 소질이 없었다. 그러니까, 차승희 같은 사람을 만났던 것이었다.

 “소명씨, 몇 살이에요? 차승희랑 동기면...”

 “아, 저는 스물다섯이요.”

 “말 놓을래요? 난 스물넷이거든.”

소명은 불편한 웃음을 지었다. 거짓으로 짓는 미소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명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이, 어둡네.”

강우는 제 집을 훑어봤다. 어두운 것 같기도 했다. 

 “미안, 불 켜줄게.”

강우가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켜자, 소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번에도 어둡길래, 좀 신기해서.”

 “평소에는 탁상 스탠드 하나만 켜 두거든. 가끔 화장실이랑.”

말을 놓으니 좀 편했다. 따뜻한 색감의 빛에 소명의 얼굴이 잘 보였다. 어제보다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파 보였다. 약간 땀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소명은 방을 둘러보다가 쌓여있는 원고지 뭉치 위에 시선을 두었다. 

 “다시 주워 왔어. 좀 잃어버렸지만."

소명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소명은 오히려 부끄러워할 것 같았다.

 "그날 일은 정말 미안해."

소명은 목이 타는지 커피를 들이켜더니, 의식적으로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는 것 같았다. 강우나 종이 뭉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티가 났다.

 "차승희랑은 친해?"

 "승희 오빠? 그다지 말을 많이 안 해봤는데."

승희와 소명이 함께 있는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승희는 시끄러운 성격에 더 시끄러운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자화상 냈을 때, 차승희 작품 있잖아. 여자 누드 기억 나?"

소명은 눈알을 굴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강우를 봤다. 곤란해하고 있었다.

 "응?"

 "언니 작품 옆에 걸렸던 거."

 "아, 그거. 교수님들이 좋게 봤었는데."

 "그렇구나."

강우는 머리를 올려 묶었다. 그 빌어먹을 누드화는 강우였다. 승희가 말하지 않았다면 강우조차 몰랐을 강우였다. 그림 속의 강우는 완전무결한 천사처럼 새하얀 두 손을 모으고 쓰러져 있었다. 자신의 누드 앞에 섰을 때, 더러웠던 기분이 떠올랐다. 

 "그거 나다?"

강우는 소명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다. 자꾸 소명과 얽히고, 소명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승희를 잊지 못해서일까? 강우는 쿠키를 우적우적 씹으며 생각했다. 

 "너랑 하나도 안 닮았어!"

갑작스럽게 소명이 외쳤다. 놀란 강우가 소명을 빤히 봤다. 소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쩔 줄 몰라했다.

 "나, 나는 그거 별로였어."

"언니 이중인격이야? 왜 소리를 질러?"

소명의 얼굴이 더욱 타오르고, 강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명이 결국 울상이 되어, 이제 가보겠다며, 일어설 때까지, 터져 나온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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