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민 Jan 10. 2021

쓰레기를 훔치다.

7. 강우는 꽃이 아니다.

 승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강우는 놀라지 않았다. 승희는 강우의 집을 알았고, 그러면 와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식간에 화가 끓어올랐다. 

"언니, 먼저 들어가. 쟤랑 얘기 좀 하고 갈게."

소명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결국 혼자 들어갔다. 들어가는 와중에도 몇 번을 뒤돌아 강우를 봤다. 승희는 그런 소명을 슬쩍 쳐다봤다.

"뭐야. 이소명 아니야?"

"왜 왔냐?"

강우의 화난 목소리에 승희가 헛기침을 했다. 

"너 나 차단했지?"

"어."

"연락은 하면서 지내자고 했잖아."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는 것도 이상했다. 왜 강우는 화가 나야 하는가? 강우가 화를 내는 것은, 승희에게 아무런 위협도 안될 것이다. 그러니까 찾아오겠지. 강우의 분노는 의미가 없었다.

"싫다고 했잖아. 왜 오는데?"

승희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강우는 그 머리통을 깨 버리고 싶었다. 점점 더 승희는 강우의 감정을 대우하지 않았다. 

"들어가서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미쳤니?"

"나도 그동안 생각 많이 했어."

승희가 불쌍한 척을 했다. 모자를 두 손에 꼭 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우는 언젠가 승희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모조리 허구 같았다. 승희는 모자라 보였다. 강우가 어떤 말을 하든지, 승희는 못 알아들을 것이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강우의 비위를 맞추려고나 할 것이다. 승희가 좋았던 적이 있기는 했나? 믿을 수 없었다. 저런 표정에 마음이 시큰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역했다. 


승희랑 헤어진 것은 오월이었다. 강우는 집에서 자고 있었다.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운 강우는, 누군가 집에 들어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승희가 강우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강우는 숨을 헉 삼켰지만 승희는 미동도 없이 강우를 바라봤다. 순간, 강우는 승희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겠지만. 대체 누가 알까? 곧 승희는 쾌활하게 문이 열려 있었다고 말했다. 강우는 믿을 수 없었다. 승희가 한참을 떠들다 돌아갈 때까지 강우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 뛰었다. 강우는 바로 비밀번호를 바꿨다. 처음에는 그 막연한 공포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승희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다정하기만 한 애인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문의 그것은 계속 등장했다. 잠시 가려질 때는 있었다. 승희의 상냥한 말투에, 어루만지는 손길에, 강우는 잠시 두렵지 않았다. 나머지의 경우에, 강우는 승희의 마음이 상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두려울 것 같아서 두려웠다. 승희가 강우의 공포를 알아채는 것도 두려웠다. 승희의 마음이 상할 것 같았다. 강우는 계속 계속 두려웠다.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감정의 나선 안에서 강우는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했다. 왜 무고한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스스로를 연약하게 만드는지 알아내야 했다. 얼마 후 승희의 아이패드 배경화면은 잠든 강우가 분명한 스케치가 차지했다. 강우는 그 순간 헤어지자고 말했다. 말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떨어져 나갔다. 몇 달이나 묵혀두어, 때가 덕지덕지 끼어버린 말이 강우를 떠났다. 강우는 순간적으로 승희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를 쳐다보며, 이 공포가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승희는 신기한 것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강우를 봤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못생기게 그리는 것도 아니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그동안 깔깔거렸던 모든 밤들이 역겨웠다. 승희는 강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면 잘못된 것 같았다. 강우 또한 승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소한 미심쩍음이 어느새 거대해져 있었다. 강우는 승희가 그리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를 그리는 승희도 소름 끼쳤다. 그녀가 예뻐질수록, 청순해질수록, 움직이지 않을수록, 강우는 기분이 나빴다. 강우는 천사가 아니었다. 신이 아니었고, 누운 채 멈춰있지도 않았다. 승희는 왜 강우를 그리는 걸까? 승희는 왜 강우를 만들어내는 걸까? 가끔 승희의 해맑게 웃는 표정이 떠오를 것 같았다. 승희의 부산스럽던 행동도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강우는 승희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간 후에도 승희는 계속 연락을 했다.


"야, 지금 안 가면 신고할 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누구 생긴 건 아니지?"

승희는 점차 씩씩 거렸다. 아주 많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참고 있는 걸까? 강우는 강우 마음대로 끝을 내도 되는 줄 알고, 연애했다. 아니었나? 

"헤어질 때 얘기 끝났어. 가. 빨리."

"이해가 안돼서 그래.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기적이라고 생각 안 해? 혼자 정리하면 끝이야?"

"네 정리는 네가 알아서 해. 너도 알겠다고 했잖아."

"그때는, 정말 헤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환장할 노릇이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해도 이것보다는 유의미할 것 같았다. 강우와 승희는 한참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강우는 간절히 승희를 보내고 싶었다. 강우는 일대일로 싸우는 자신과 승희를 떠올렸다. 강우는 죽을 것이다. 승희도 알고 있었다. 강우의 심장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주변은 미치도록 깜깜했다. 

"강우야! 그만 들어와!"

강우와 승희가 동시에 건물을 올려다봤다. 오렌지빛이 비어져 나오는 작은 창문에 소명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이소명이랑 같이 살아?"

강우는 잠시 숨을 안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호흡했다. 심장소리가 귀 뒤에서 들렸다. 

"다시 오면 죽여버린다."

강우가 입구로 들어가는 동안 소명은 그 둘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창피하면서, 너무나 안심이 됐다. 승희는 따라 들어오려다가 소명 쪽을 보고는 멈췄다. 승희의 얼굴이 억울함과 분함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이전 06화 쓰레기를 훔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