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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Jan 18. 2021

쓰레기를 훔치다.

8. 따사로운 굴레

  소명은 멀어지는 승희의 뒤통수를 오래 바라봤다. 승희는 머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걸어갔다. 그는 어둠에 휩싸여 곧 보이지 않았다. 소명은 강우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몇 번을 망설였다. 부르자마자 바로 올라오는 것을 보니, 소명이 큰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강우의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강우의 얇은 샌들이 타박타박 계단을 쳤다. 고작 몇 걸음이지만 마중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4층 입구에 서 있자, 아래쪽에서 강우가 고개를 들어 소명을 쳐다봤다. 강우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보 같은 말은 하기 싫었다. 소명에게 소명의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명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4층 조명이 툭 꺼졌다.  강우가 남은 몇 계단을 뛰어오르고, 다시 불이 켜졌다. 

"뭐해? 우리 뭐 먹을까?"

소명은 강우의 얼굴에서 슬픔을 발견하지 못했다. 강우가 괜찮기를 바라면서도, 괜찮아 보이니 불안했다. 소명은 자신의 나쁜 버릇을 상기하려고 했다. 나쁜 상황을 가장 나쁘게 만드는 버릇. 작은 상처를 계속 들여다보고 헤집어서 큰 흉터를 남기는 버릇. 강우가 괜찮지 못할 일은 없었다. 어쨌든 소명은 모르는 일이었다.   

"강우,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소명은 자신의 냉장고를 떠올렸다. 아이스크림만 잔뜩 들어있었다. 강우는 집에 간단한 반찬이 있다고 말하면서, 저번에 소명이 사 온 쿠키를 후식으로 먹자고 했다. 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할 동안 씻으라며 강우는 소명을 들여보냈다. 소명은 벽 하나 두고 떨어져 있는 이웃이 저 먼 세계에 홀로 떨어진 듯이 애탔다. 옷을 벗어 걸어두면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한 때와, 혼자 있으면 무너지는 때를 가늠해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 가치도 없는 생각은 그만 하고 싶었다. 어차피, 소명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소명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혼자 있고 싶다면, 나도 네가 편한 게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강우의 집 문을 두드리자 여느 때와 같이 바로 문이 열렸다. 강우는 아까와 달리 머리칼을 높게 올려 묶고 있었다. 안경을 써서 더욱 달라 보였다.

"왔어? 빨리 씻었네."

"나 밥 먹어도 돼?"

소명의 머릿속에서 뒤엉킨 말들이 급하게 튀어나왔다. 강우는 한쪽 눈썹을 쭉 올리고, 소명을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소명이 머쓱하게 강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반찬 몇 가지가 작은 탁상 위에 차려져 있었다. 메추리알 조림과 파김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으면 잘 챙겨 먹지 않기에, 제대로 된 반찬은 오랜만이었다. 강우는 국을 끓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 뚝딱뚝딱 만드는 것이 놀라웠다. 

"강우야. 나도 뭐 좀 도울게."

"응? 언니 그냥 앉아있어. 나중에 설거지해줘."

강우는 작게 웃었다. 냄비에 이것저것을 넣고 저으면서, 소명은 요리를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소명은 강우 근처에서 좀 기웃거리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명은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간단히 굽거나 끓이는 것은 할 줄 알았다. 보통은 야채를 생으로 먹거나, 돈이 없으면, 인스턴트를 먹었다. 요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근데, 방이 밝네."

며칠 전, 어두컴컴했던 방을 떠올리며 소명이 말했다. 

"아, 응. 언니 온다고 켰어."

"어두우면 불편하지 않아?"

강우는 작은 냄비를 행주로 감싸 쥐고 탁상으로 왔다. 된장 냄새가 났다. 강우는 바로 일어나서, 작은 창문을 열었다. 매미소리가 들이쳤다. 침대 위의 창문에는, 동전 하나가 줄로 묶여 있었다. 창 안으로 밤바람이 불어오자, 동전이 살짝살짝 돌아갔다. 

"내가 집중을 잘 못해서. 방이 밝으면 일을 못 해."

"글 쓰는 일?"

강우는 끄덕거리고서 소명의 수저를 챙겨주었다. 그리고 별안간 박수를 짝 치더니, 선풍기 버튼을 눌렀다.

"더웠지? 미안. 내가 더위를 안 타서, 생각을 못했네."

강우가 허둥대며 말했다. 

"아니야, 별로 안 더웠어."

선풍기 바람이 몇 장의 종이를 흐트러뜨렸다. 강우는 책 밑에 종이들을 끼워 두었다. 정말 평소에는 선풍기를 안 켜는 모양이었다.

"냄새가 너무 좋다. 잘 먹을게."

"많이 먹어. 나 요리 잘하거든."


소명은 밥을 한 공기 하고도 약간 더 먹었다. 평소보다 두배를 더 먹은 것이다. 강우는 두 그릇을 먹었다. 평소처럼 먹은 것이라고 했다. 강우의 요리들은 맛있었다. 소명이 연신 감탄을 하자, 강우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소명은 바로 설거지를 했다. 강우는 상을 치우고, 쿠키를 꺼내왔다. 저번에 함께 먹은 이후로 줄지 않은 것 같았다.

"과자 별로 안 좋아해?"

고무장갑을 벗어 널어놓으며, 소명이 물었다.

"아, 그렇긴 한데, 이건 맛있더라."

강우가 슬쩍 소명의 눈치를 봤다.

"진짜야. 언니 간 다음에도 두 번인가? 나 혼자 꺼내 먹었어."

"단 걸 잘 안 먹는구나?"

강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쿠키는 맛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에는 다른 걸 줘야겠다."

소명은 속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강우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강우는 과자를 우걱우걱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했다. 소명은 그냥 가볍게 뱉은 말인데, 상냥하게 반응하는 강우가 고마우면서 귀여웠다. 소명이 웃자, 강우는 먹던 쿠키를 슬쩍 내려놓았다. 

둘은 한참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명은 강우가 군것질보다 제대로 된 식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강우는 소명이 두 끼 중에 한 끼를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로 먹는다는 사실에 기겁을 했다. 소명은 많이 웃었다. 과외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강우도 많이 웃는 것 같았다. 소명의 알람이 울렸다. 아홉 시였다. 소명은 알람을 껐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언니, 내가 밥 해줬잖아."

강우가 빈 접시를 톡톡 쳤다. 강우의 표정이 진지했다. 아래를 보고 있는 눈매에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강우의 낮은 목소리에 소명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뭔데?"

강우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슬쩍 소명을 쳐다봤다. 소명은 강우가 안경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눈을 피했을 것이다. 강우는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홍시 화실 같이 가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소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웠다. 강우는 곧 다시 눈을 접시에 고정했다. 사슴이 그려져 있는 파란 접시였다. 강우는 그 사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소명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소명은 거절하려고 했다. 소명이 입을 떼기 직전에 강우가 말했다.

"나 비겁한 거 알아." 

"응?"

"밥 먹여놓고, 거절 못하게 그러려고 했던 거 아닌데."

강우의 표정이 묘했다. 소명은 순간 강우가 우는 줄 알고, 가까이 갔다. 안경에 반사된 빛을 눈물로 오해한 것 같았다. 

"아까, 차승희 찾아온 거, 진짜 무서웠어."

소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우가 천천히 계속 말했다.

"언니가 나 불러줘서 다행이었어. 아니면 계속 붙들려 있었을 거야. 고마워."

강우가 한 단어 한 단어를 꾹꾹 눌러 말해서, 소명은 괴로웠다. 잠시 강우의 두려움이 소명에게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가끔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어. 분명 화가 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해."

강우는 탁상에 왼쪽 뺨을 대고 엎드렸다. 접시 위로 강우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소명은 조심히 접시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강우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소명은 강우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오늘 이렇게 힘들었으니, 자기 말대로 해달라며, 떼를 쓰고 있었다. 소명이 작게 말했다.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으면, 네가 알아서 차승희를 보내고, 잘 들어왔을 거야."

"아닐걸? 걔가 집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거야."

강우의 말이 맞았다. 

"다 괜찮았을 거야."

결국은 바보 같은 말을 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한 번 나온 말들은 자꾸 꼬리를 달았다.

"네가 승희 오빠를 죽였을 거야."

고개를 든 강우가 소명을 쳐다봤다. 놀란 것 같았다. 소명도 놀란 채였다. 소명이 말을 시작한 그때부터 놀란 채였다.

"너는 괜찮았을 거야. 네가 차승희를 죽였을 거야."

"응."

강우는 그냥 '응'이라고 했다. 뭐가 '응'이라는 걸까? 그만 말하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강우는 턱을 괴더니 소명을 빤히 쳐다봤다. 

"언니, 나도 지성인이 되고 싶어."

소명은 아직 자신이 뱉은 멍청한 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강우는 입을 열고 낮게 중얼거렸다. 강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말이야. 사람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 때리지 않는 역할이 하고 싶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의가 아니니까 죽이지 않는 역할이 하고 싶어."

소명은 강우의 분함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 분노는 이미 소명 안에도 있는 것이었다. 

"맞을까 봐 때리지 못하는 역할은 하고 싶지 않아. 그건 비참해."


강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소명의 눈에 닿아 있었지만 어딘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강우의 말을 소명은 이해했다. 완전히는 아닐지 몰라도, 필요한 정도로는 무척이나 이해했다. 그 말은 이미 수없이 많은 입술에서 수많은 언어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 말은 슬픔과 분노 외에 유의미한 변화를 담고 있어야 했다. 태초로부터 많은 것이 변했을 테지만 어떤 말은 그대로였으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소명에게 푸른 강우의 회화가 떠올랐다. 강우의 표정과 흩어지는 머리칼과 수백 개의 칼들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강우가 떠올랐다. 탁상에 뺨을 대고 축 쳐져 있는 강우가 떠올랐다. 온갖 푸른 조각들이 모이고 흩어지며, 강우가 되었다가, 살인자가 되었다가, 슬퍼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되었고, 끝내 추락하는 무연의 발버둥이 되었을 때, 소명은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나 그만 가볼게."

소명이 벌떡 일어나서 문쪽으로 걸어가자, 강우가 따라 일어났다. 강우는 어쩔 줄 몰라했다. 소명은 문을 열고 나갔다. 센서등이 켜졌고, 소명은 그럼에도 깜깜한 복도를 잠시 응시했다. 

"그래. 화실 같이 가자."

정말 화실에 가도 괜찮을까? 아닐 것이다. 회화에 대한 인상을 받은 것은 오랜만이었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소명은 생각을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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