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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Jan 31. 2021

쓰레기를 훔치다.

10. 나의 파랑과 당신의 것

  어느덧 일곱 시였다. 술을 마시려고 테이블에 모인 사람은 연지와 형우, 민석, 강우, 소명, 이렇게 총 다섯이었다. 에이미라고 불리는 여자는 테이블 한쪽에서 아직도 노트북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형우는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일어나 사라졌다. 많은 화분들 사이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소명은 잔을 들고 그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와인은 오랜만이었다. 사실 자퇴 후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실 만큼 힘든 일도, 기쁜 일도 없었다. 살짝 입에 댄 와인은 떫었다. 혀가 바짝바짝 갈라졌다. 어느새 형우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그 봉지 안에는 사과와 귤 몇 알이 들어있었다. 형우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테이블에 놓으며, 깨끗이 닦은 거라고 말했다. 소명은 이 화실 어디선가 형우가 직접 따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한구석에 있는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왔다.

“왼쪽 냉장고는 물감용이고, 오른쪽 건 음식용이니까, 자유롭게 사용하세요.”

민석이 넓은 접시에 치즈 몇 종류를 툭툭 놓아두자, 에이미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에이미는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고 형광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어 눈에 띄었다. 에이미는 낱개 포장되어있는 치즈를 빠르게 뜯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와인을 따른 뒤 자리에 앉았다. 에이미는 소명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치즈를 먹으면서 핸드폰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에이미의 손톱이 눈에 띄었다. 엄지손톱만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나머지 손톱들은 짧게 깎여 있었다. 소명도 과일과 치즈를 먹었다. 이곳에서 먹고 마셨으니, 다시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소명은 바보 같은 상상을 했다. 강우는 가방에서 원고지와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금요일마다 모여서 놀거든. 말이 모임이지, 각자 할 거 하거나, 술 마시거나 해.”

연지가 강우의 말에 덧붙였다.

“금요일 밤에 말이야. 청승맞은 사람들끼리.”

연지는 소리 내서 웃었다. 형우가 연지의 잔에 와인을 더 따라주었다. 벌써 두 잔째인 모양이었다.

“나는 조각을 해요. 바위를 가지고.”

연지가 사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 소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민석이 설명했다.

“연지는 금요일 모임에만 오고, 작업은 따로 해요. 어디라 그랬지?”
 “있어. 산 좋고, 물 좋고, 돌 좋은 곳.”
 소명은 연지가 커다란 기계로 돌을 잘라내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바위를 조각하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상상 속의 조각 기구는 어쨌든 연지보다 커다랬다. 강우는 연지가 자기 몸집에 몇 배가 큰 작업을 하더라고 말했다. 

“멋지죠.”

내내 가만히 있던 형우가 입을 열자, 연지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피어났다. 소명도 연지가 멋진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둘이 참 잘 어울렸다. 연지와 형우가 둘이 이야기하는 동안, 소명은 살짝 주위를 둘러봤다. 꽤 많은 작가가 세를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작품이 많았다. 

“저... 강우는 어떤 걸 해?”

강우는 소명과 눈을 맞추고, 치즈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와인을 한 입 마시고는 말했다.

“나는 글을 써.”

“어떤 글?”

강우는 소명을 더욱 빤히 쳐다봤다.

“언니 파랑도 보여줘야지.”

소명은 강우의 의미를 훅 삼키고, 얼른 눈을 돌렸다. 괜히 귤 하나를 까며, 민석이 프로젝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봤다. 강우는 소명의 잔에 와인을 채워주었다.

 

  소명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아홉 시였다. 형우는 한 잔을 다 비우지 않고, 캔버스 앞에서 작업을 계속했다. 

“형우는 다음 달에 개인전이 있어요. 돈이 많거든요. 재수 없는 놈이죠.”

연지가 웃으며 말했다. 연지는 냉장고에서 와인 한 병을 더 꺼냈다. 민석이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홍시 화실에서 작업하는 작가의 작업인데, 미리 보는 거라고 했다. 강우는 불을 껐다. 영상 안에 작은 점이 하나 깜박깜박거렸다. 츠츠-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점은 울렁거리며 커지고, 다른 점을 낳더니 터져버렸다. 색색의 점들이 점점 많아지며 소리도 점점 커졌다. 점 중 하나가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그녀는 점들과 함께 화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역시 점을 남긴 채 터져버렸다. 연지는 담요를 꼭 감싸 쥐었다. 민석이 연지 입에 귤 한 조각을 넣어주며 옆에 앉았다. 영상은 길었다. 새롭다거나 특별한 감동이 있지는 않았지만, 소명은 마음이 벅차서 슬펐다. 오랜만에 느끼는 현대미술이 재미있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 듯했다. 평소였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터였다. 연지와 형우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고, 강우와 소명은 나란히 앉아 불규칙한 소리와 규칙적인 점들의 일상에 집중했다. 강우가 말했다.

“그날 있잖아. 언니가 내 원고 훔친 날.”

소명은 고개를 돌려 강우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취한 것 같았다. 강우의 얼굴이 프로젝터의 빔 때문에 창백하게 빛났다. 강우는 눈을 영상에 두고 말을 이었다.

“도저히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야. 아니지, 마음이 안 돌아가는 거지. 하고 싶은 얘기도 없고.”

강우는 띄엄띄엄 얘기를 하다, 술을 마시다 했다. 한 잔을 채 안 마셨는데도 강우의 술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별로 엄청난 일은 아니거든? 늘 그러니까. 근데 그 날은 감당이 안 되는 거야. 문자들이 막 엉켜서, 나를 왕따 시키는 기분인데... ”

영상은 거의 막바지를 달렸다. 점들은 이미 터져버린 점들에 잠겨서 허우적댔지만, 계속 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왜지? 

“막 얘기하는 거야. 지금까지 내가 쓴 건 다 거짓이라고. 내 건 하나도 없다고. 비가 갑자기 오는데, 우두두두 그 소리가,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아닌가? 쫒아 오는 건가? 양치기 개가 양 몰아오는 것처럼. 나는 털 깎이기 싫은데.”

불이 탁 켜졌다. 강우는 박수를 쳤다.

“다 그만두고, 새 시작하고 싶었어. 다 버리고 말이야. 그것들이 날 버리기 전에.”

강우의 파랑이 소명의 것과 너무 같아서, 소명은 괴로웠다. 그것은 재능의 문제라기보다, 자본의 문제라기보다, 허무를 견디는 인내의 문제인 것 같았다. 

“계속 쓸 것 같아. 쓸 수 없을 때까지는. 그때가 오면 딱 그만두고 살아야지. 계속 쓸 것 같아.”
 강우의 앞에는 치즈 껍데기가 쌓였다. 소명은 강우의 모순된 중얼거림을 가만히 귀에 담았다. 그 날에, 원고를 빼앗은 건 잘한 일이었을까? 소명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어지러웠다. 두려워질 것 같았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두려울 것 같았다. 사실 이 화실과, 사람들은 없었고, 작품들도 없었고, 강우도 없었고, 다음 장면에 소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터지는 점처럼 전부 사라질 것 같았다. 소명은 강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만 가자. 강우야.”

강우는 순순히 일어나서 짐을 챙겼다. 나가는 길에 연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둘은 화실을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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