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민 Jan 25. 2021

쓰레기를 훔치다.

9. 예술과 인간

  홍시 화실은 금요일 과외 장소로부터 아주 가까웠다. 소명은 퇴근시간의 지하철을 꾸역꾸역 끼워 탄 채 생각에 잠겼다. 강우의 서러움에 슬픈 나머지,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소명이 화실에 가도 될까? 2년 동안 그림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회화 앞에 서면 평면의 부질없음과 무력감이 소명을 죽일 것 같았다. 강우는 소명에게 금요일 오후 여섯 시에 홍시 화실 앞에서 보자고 말했다. 그때 강우의 눈빛이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이상한 곳 일지도 몰랐다. 사이비는 아니겠지? 이제 와서 온갖 불안이 소명을 위축시켰다. 주희가 소개해 준 곳이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길게 늘어졌다. 화실에 가면 안 되는 백 가지 이유를 꼽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소명은 자신이 그 백가지 이유를 들어, 가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럼에도 꼭 가고 싶은 것인지 헷갈렸다. 혼란스럽게 휘몰아치던 마음에도 소명은 계속 걸어, 결국은 그 간판 앞에 도착했다. 

새카만 바탕의 간판에는 붉은 글씨로 홍시라고 쓰여있었다. 대체 무엇을 나타내는 간판인지 알 수 없는 빨간 글자에 소명은 더욱 불안했다. ‘홍시’ 밑에는 ‘예술과 인간’이라는 의문의 문구와 전화번호가 작게 쓰여 있었다. 소명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주희가 연락을 해 보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번호였다. 이런 간판은 아무런 홍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소명이 줄줄이 외운,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 늘어난 것 같았다. 소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5시 40분이었다. 소명은 홍시 화실 맞은편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아이들 한 무리가 건물 앞으로 뛰어왔다가 소명을 흘깃흘깃 쳐다봤다. 그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깔깔거리곤 반대쪽으로 뛰어 사라졌다. 얼마나 잘 뛰는지 땅이 와르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며칠 동안 과외 보충수업을 바짝 하느라 지쳤는지, 잠시 앉아있는 것에도 몸이 나른해졌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간판을 보자 긴장이 풀렸다. 소명은 돌 벽에 약간 기대어, 의문의 건물을 쳐다봤다. 5층짜리 건물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낡아 보였다. 유리 대문은 먼지가 덕지덕지 앉아 도저히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하고, 건물로 들어가는 몇몇의 사람이 보였다. 소명은 누가 화실로 가는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후에는, 간판이 달린 삼층 창문에서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강우가 소명 바로 옆까지 와서야 소명은 그 존재를 알아챘다. 얼마나 놀랐던지 소명은 돌 벽에 손등을 스쳤다. 손등은 하얗게 일어나 곧이어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강우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프겠다. 미안해. 저기서부터 불렀는데, 계속 못 듣길래.”

“괜찮아. 그냥 살짝 까졌나 봐.”

소명은 엉덩이를 털었다. 막상 강우가 오니, 다시 긴장이 되었다. 강우는 소명의 손등을 자꾸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했다.

“오른손이네. 아마 화실에 뭐가 있을 거야. 밴드나...”

강우가 소명의 손을 잡고 입구로 다가갔다. 유리문의 코 앞에서도 그 안은 보이지 않았다.      


강우는 삼층 철 문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나 왔어!”

모든 곳이 초록색이었다. 화분이 수 백개는 되어 보였다. 소명은 조심스럽게 물감 냄새를 들이마셨다. 심장이 덜컹하며 내려앉았다. 소명은 아직 준비가 안됐다. 강우는 소명의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다. 소명은 강우가 무서워졌다. 미웠다. 대체 뭘 안다고.

“강우!!”

어떤 사람이 튀어나와서 강우를 끌어안았다. 소명은 놀란 채로 뒤로 밀려났다. 

“연지야!”
 강우도 밝은 얼굴로 연지를 안았다. 연지는 갈색 둥근 머리통의 여자였다. 키가 작았고, 아주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시 보니 수영복인 것 같았다. 연지는 곧 소명을 발견하고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연지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소명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연지입니다.”
 동그란 머리통에 동그란 눈에 수영복을 입은 연지가 살짝 소명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
 쓸린 곳이 눌려서 소명은 손을 휙 뺐다. 소명도 큰 키가 아닌데, 연지가 바짝 가깝게 서 있자, 키 차이가 났다.

“안녕하세요. 이소명입니다.”
 “언니 손 쓸렸지? 일단 약부터 발라야겠다.”

연지는 소명의 손등을 쳐다보고는 상처 나지 않은 다른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아팠겠다.”

소명은 연지가 너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서, 잠시 동안 잡을 줄도 몰랐다. 연지의 손은 시원했고, 살짝 축축했다. 사실 연지는 온몸이 젖어 있었다. 

“물놀이해서 그래요.”

연지는 웃으며 말했다. 큰 화분이 워낙 많아서 화실 안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겉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꽤 넓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소명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이 뛰고 있었다.  

“다들 어디 갔어?”

강우가 연지에게 물었다. 

“창고에 있어. 이젤 조립한다고.”

강우는 안 쪽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보면 숲을 헤치며 걷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록이었다. 소명도 강우를 따라 들어갔다. 곧 잘 정돈된 공간이 눈에 들었다. 붉은 타일 바닥에 역시 화분이 많고, 벽을 따라 이젤이 서 있었다. 공간의 중간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흰 조명이 환했다. 기름 냄새가 훅 풍겼다. 어떻게 이런 공간이 있지?

“저기로 가면 욕조도 있어요.”

연지는 잡은 손을 살짝살짝 흔들었다. 곧이어 한 편의 작은 문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소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소명씨 왔어요?”

새까만 짧은 머리의 여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강우랑 같이 왔구나. 잘 왔어요. 주희네 언니 맞죠? 연락이 없어서 이상했잖아.”

이 호랑이 같은 눈을 가진 여자가 주희가 소개한 선배라는 사람이었다. 또 예상하건대, 홍시의 대표였다. 

“언니, 연고 있어요?”

여자가 연고를 찾는 동안 소명과 강우는 테이블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연지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은 하나 둘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단 한 사람만 남자였다. 안경을 쓴 그는 키가 컸고, 온몸에 물감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각오했지만, 여러 색의 얼룩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소명은 일부러 이젤에 놓인 그림들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화실은 선선했다. 한여름인데도, 에어컨을 켜놓은 것 같지도 않은데, 매우 쾌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낯섦과 긴장에, 땀을 뻘뻘 흘렸을 것이다. 습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풀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이었다. 


“손 줘 볼래요?”

정민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소명의 손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소명이 하겠다고 했지만, 고집을 부렸다. 민석은 주희랑 자신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강우에게 소명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이야기했다. 여러모로 수상한 곳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소명이 상상했던 사이비 집단의 모습과 비슷했다.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얽혀 들어 소명을 홍시로 몰았다. 그들의 호의가 낯설었고, 간지러웠으며, 불편해 미칠 노릇이었다. 민석은 소명의 손을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리고 정사각형 모양의 밴드를 붙였다. 소명은 까진 상처에 이 정도의 정성스러운 처치를 해 본 적이 없어 민망했다. 정말, 흔적도 없이 나을 것 같았다. 소명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이제 소명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 남자는 이젤 앞에서 그림을 들여다보았고, 머리가 부스스한 안경 쓴 여자는 테이블 한편에서 노트북을 딸깍 거리는 중이었다. 폭풍우 같은 관심이 휙 지나가고, 소명은 한없이 불편한 고요 한가운데 들어온 것 같았다. 

“언니, 여기 좋지 않아요?”

강우는 초록이랑 잘 어울렸다. 강우의 머리칼은 마치 넝쿨처럼 공간에 스며들고, 그의 주근깨가 더욱 빛나 보였다. 강우는 아까부터 소명의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신이 떼를 써서 소명을 데려온 것을 잘 아는 듯했다.

“응. 신기해. 정글 같아.”

소명의 대답의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생전 처음 온 곳에서 강우는 아주 오랫동안 알던 사람처럼 친근했다. 강우와 소명이 화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까의 작은 문에서 연지가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연지는 자기 몸보다 큰 이젤을 들고,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아, 나 부르지.”

민석이 벌떡 일어나 이젤을 받아 들었다.

“소명씨 건데, 어디 둘까요?”

“예?”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소명이 급히 되물었다.

“소명씨 이젤이요. 주희가 소명씨 그림 작업한다고 하던데.”

“아니요. 저는... 필요 없어요.”

“이젤을 안 쓰시나요?”

민석의 순수한 물음에 소명은 말문이 막혔다.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왜 설명을 해야 하지?

“소명 언니는 당분간 그림 안 그린댔어.”
 강우가 소명의 손을 만지작대며, 괜히 밴드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민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소명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와줄래요? 화실을 좀 소개하고 싶어요.”
 민석의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며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인상적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강우와는 또 다르게 나무 가득한 화실과 꼭 어울렸다. 소명은 천천히 일어났다. 강우는 자신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눈으로 두 사람을 좇았다. 먼저 민석은 창고라고 소개하며 작은 문을 가리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담한 방이 온통 그림이었다. 걸려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봉해진 채, 겹쳐 서 있었다. 한쪽에는 공구를 정리해 놓은 선반과 나무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실 평범한 캔버스 보관용 창고였고, 밖에 비해 놀라운 것은 없었다. 다시 문을 닫고 나온 민석은 바로 옆에 있는 화분 뒤로 걸어 들어갔다. 큰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그 안쪽에도 문이 있었다. 철 제 문을 열자, 안쪽은 더욱 평범한 화실이었다. 거기도 일정 간격을 두고 이젤이 세워져 있고 한쪽 벽에는 긴 나무 책상이 길게 놓여 있었다. 아까 인사했던 여자가 그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그리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에 소명은 귀를 긁적였다. 간지러웠다. 사무실 두 개를 문을 터 함께 쓰는 듯했다. 소명과 민석은 말없이 넓고, 황량한 공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숲의 가운데로 돌아왔다.

“작가분들 중에 정신없는 공간을 질색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다해가 그래요. 아까 작업하던 사람이요.”

소명도 이 초록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한 것에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강우는 어디선가 와인 잔을 잔뜩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소명은 노트북에 한껏 집중하던 여자의 눈치를 봤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 와인 마실래?”

강우는 가방 속에서 편의점 와인을 두 병 꺼냈다. 어느새, 연지가 옆에 앉아, 잔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우는 여덟 잔 중, 다섯 잔에 술을 따랐다. 그중 한 잔을 소명 앞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냥 앞에 둘게. 마시려면 마셔.”
 그림 앞에 있던 남자는 연지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연지 옆에 앉았다. 강우는 소명의 시선을 보고, 그가 이형우라는 동양화과 학생이며, 연지의 남자 친구라고 말했다. 

“아, 그걸 왜 강우가 말해?”

연지는 강우의 팔을 찰싹 쳤고, 형우는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이소명입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 소명이 와인잔을 만지작거렸다.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이전 07화 쓰레기를 훔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