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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Feb 14. 2021

쓰레기를 훔치다.

외전 - 강우의 꿈

  푹 잠들기에는 몰아친 목소리가 많은 밤이었다.     

 

  어두운 방이다. 내가 상상 속에 나를 놓아두는 곳이다. 아는 곳에 익숙한 물건들이 놓여 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 아주 희미한 탁상 조명이 흰 빛을 뿜어낸다. 그 빛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낯선 것이 보일까 봐, 곧 불이 꺼질까 봐 초조하다. 방 안에서 혼자 죽어 내면, 적어도 우아할 것이다. 골목 어귀에서 죽어간 분신들보다는 나은 모습일 것이다. 언젠가 불을 켠 적이 있는 것 같다. 언제였더라.     

"불 켜지 마! 이미 충분해."     

창 밖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유리 창문이 덜덜 떨린다. 나는 어둠 속에 익숙한 걸음을 내디뎌 창문 밖을 응시한다. 곧,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강우야."     

나는 바로 뒤돌지 못한다. 아는 음성이다. 아니, 전혀 모르는 사람인가? 창에 비친 실루엣이 보인다. 누구지?
 "집이, 어둡네."     

소명은 작은 탁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버릇처럼 머리카락 끝을 문지르고 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일어나서 불을 켜 줘야겠다.     

"불 켜지 말라고 했잖아!"     

창 밖에서 다시 누군가 소리친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그곳을 본다. 비가 오고 있다. 물방울이 창문을 거칠게 때리고,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둠이 익숙하다. 그 안에서 나는 촘촘한 그물에 올라타 있다. 잘 짜인 계획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는 버려지지도, 우습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불을 켤 수 없겠어. 빛은 언젠가 사라지고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낯설 테지.         

"이만 가자. 강우야."     

뒤에서 다가온 소명이 나의 손을 잡는다. 나는 뿌리친다. 내가 언니의 손을 내치다니.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다. 나는 다시 창 밖을 본다. 소명은 말이 없다. 나는 소명이 가 버렸는지 생각한다. 나는 뿌연 물안개 사이로 내 편을 찾으려고 해 본다. 소명이 떠난 자리를 볼 수가 없기에 뒤 돌지 못한다. 어둠 속은 안전하고, 나는 외로운가?     


다음 장면, 나는 밝은 색의 나무 바닥 위에 서 있다. 뜨거운 조명이 나를 비추고 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죽여도 되나? 나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려친다. 그는 힘없이 흔들릴 뿐이다. 이제는 주먹을 그의 코에 내리꽂는다. 주먹이 웅웅 거리며 울린다. 저 피부 속에서 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전해진다. 그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될수록 나는 두렵고, 주먹질을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다시 본 그는 이제 열댓 살 소녀의 얼굴이다. 내가 실수를 했나? 나는 뒷걸음질 친다. 죄책감이 든다. 나는 아주 나쁜 사람이다. 소녀는 미동 없이 누워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다가가 소녀를 들여다본다. 나의 얼굴이다. 머리카락이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뱀처럼 목을 조른다. 나는 전부 포기하고 외친다.     

"여러분! 내가 죽겠습니다. 이게 맞군요. 내가 왜 남을 해치겠습니까?"     

승희가 소리 지른다.     

"너는 상처가 너무 많아!"     

승희는 애틋하게 나의 손을 감싸 쥔다. 나는 덜덜 떨고 있다. 머리카락이 내 목을 파고든다. 승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한다.     

"강우. 넌 더 아프면 안 돼. 지금 아프면 패배하겠지."     

"맞아. 난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승희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인 듯이 나는 숨 쉬지 못한 채 점점 쓰러진다. 막이 천천히 내린다. 

    

"이만 가자. 강우야."     

소명이 나의 어깨를 잡는다. 나는 전기가 통한 듯이 튀어 오른다. 소명은 내 축축한 얼굴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울었어?"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른다. 연극이었구나. 다행이다. 소명은 내 어깨를 조심히 쓸어준다.     

"언니, 저 배우 살아 있겠지? 다 연기니까."      

"그래. 다 연기니까."     

소명은 이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연극이 아니었다면 큰일이지. 다 죽었을 거야."     

나는 새빨간 막을 멍하니 바라본다.     

"맞아. 아니면 죽였거나."     

소름이 훅 끼쳐온다. 두 손에 축축한 감촉이 남아있다. 마치 내가 누굴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극장은 텅 비어있다. 소명과 나, 둘 뿐이다. 소명은 자꾸 출구를 쳐다본다. 이제 갈 때가 된 거지. 우리는 극장 의자들 사이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빠져나간다.      

"불 꺼!"     

누군가 소리친다. 소명과 나는 어느새 서로의 팔을 붙들고 있다. 누구지? 극장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주위는 암흑이다. 소명은 아직 내 팔을 잡고 있다. 조금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 쯤, 소명이 바짝 다가온 것이 느껴진다. 소명은 내 왼쪽 귀에 속삭인다.     

"집이 어둡네. 불 켜 강우야."     

오른쪽 귀에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속삭인다.     

"뭐가 어둡지? 이미 충분해. 네 계획으로 충분해."     

소명이 나의 팔을 끌어당기며 소리친다.     

"불 켜. 강우야, 불 켜!"     

조명이 내가 서 있는 곳을 비춘다. 미약하지만 나는 소명의 표정이 보인다. 소명은 슬픈 표정이다. 슬퍼서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다.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소명도 소리치고 누군가도 소리친다. 나는 내가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무도 해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극장으로 한 줄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열린 문 틈으로 배우가 들어온다. 아까 그 배우구나! 죽지 않았어. 배우는 자주색 정장을 입고 있다. 나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는다. 배우가 나를 응시한다. 가장 아픈 곳이 진동하고, 나는 죄책감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배우는 나의 코 앞에서 멈춘다. 나와 눈을 맞춘 그가 천천히,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다정하게 말한다.     

"아직 어둡군요. 불을 켜야 합니다."      

강우는 헉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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