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화실에서 나와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소명은 알 수 없었다. 강우의 손을 놓칠 듯이 잡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 기억만 있었다. 강우는 비틀거리며 걸었고, 소명은 손아귀에 힘이 없었지만,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아주 밤은 아니었다. 아주 밤이란, 취한 사람을 머물 곳 없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었다면, 둘은 정착하지 않고 세상을 빙빙 돌았을 터였다. 여기에서 술을 마시다가, 또 금방 나와서 저기서 술을 마시다가, 집과 침대를 잃은 채로 부유했을지 몰랐다. 어쨌든 시간은 열 시가 조금 넘었고, 소명은 어지러웠으나 멀쩡했다. 소명과 강우는 멈추지 않고 걸어 집에 도착했다. 서로의 문 앞에 서자 소명은 안도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좀 가시는 듯했다. 사람들과 있으면 그들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옆에 누가 있느냐 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두려움이 중요했다. 상실의 두려움. 사랑한다면 감당해야 할 불쾌한 예감. 소명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단어들이 뚝뚝 떨어졌다. 강우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소명은 문득 혼자였고, 손을 잡은 것을 전부 잊고 싶었다.
“언니, 오늘 같이 가줘서 고마워. 잘 자.”
“너도 잘 자.”
소명은 강우가 도어록 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서 있었다. 자신이 손을 잡았기 때문에 외로워졌는지도 몰랐다. 그럼 계속 외로워야 할까?
소명은 전등 스위치를 켜지 않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명의 유일한 쉴 곳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무어라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윗집이거나 아랫집이거나. 소명은 가만히 서 있었다. 어둠 속에 시계의 빨간 선들이 빛났다. 10 : 46. 자꾸 깜박이는 숫자를 쳐다보자, 그것은 곧 10 : 47 이 되었다. 점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보였다. 소명은 아직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작은 침대, 쌓여있는 자격증 책들, 방바닥에 납작 누워있는 충전기도 보였다. 소명은 눈을 비볐다. 침대 옆에 메모집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검정 색이었으므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나 소명은 다른 무엇을 볼 때보다 집요하게 메모집을 쳐다봤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것은 완전히 보이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명은 그 굴레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소명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명은 팔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전등을 탁 켜는 순간, 소명은 왜 방 안을 두리번거렸을까? 소명은 왜 무연을 찾았을까?
순식간에 빛이 방 안을 채웠다. 눈이 놀랐는지 눈물이 났다. 소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숨이 막혔다.
무연의 장례가 끝나고 소명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연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왜 죽었을까? 모든 것이 미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무연의 친구들도, 무연이 좋아하던 노래도, 무연과의 기억도, 무연의 목소리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장례식의 곡소리도, 몇 번이나 실신한 주희도, 하나뿐인 언니도 미웠다. 무엇보다 답을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자기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미워한들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노와 죄책감이 소명을 따라다녔다. 소명이 하는 모든 말에, 행동에 전부 죽음이 따라다녔다. 소명은 무연의 숨이 멎은 모습을 잊었다. 늘 소명에게 떠오르는 무연은 그가 죽기 며칠 전, 버스에 올라타던 모습이었다. 소명이 밥을 먹을 때마다 무연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면 소명은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소명이 웃을 때마다 무연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면 소명은 자기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소명이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마다 무연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소명은 무연을 살려낼 수 없으므로 그림을 그려선 안됐다. 시간이 지나며, 무연은 손을 흔드는 모습보다 ‘무연’이라는 활자로 더욱 많이 떠올랐다. 소명은 언니의 얼굴이나 그 날 입었던 옷이 흐릿해질수록 조금씩 더 웃고, 조금씩 무언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만은 그릴 수 없었다. 소명이 가장 잘하는 한 가지를 했음에도 무연이 돌아올 수 없다면 어쩌지? 가장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명은 그림만은 그릴 수가 없었다. 마주하지 않으면, 조금 괜찮은 것 같았다.
소명은 주저앉은 자리부터 침대 맡까지 기어갔다. 이렇게 엉엉 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턱에 눈물이 모여 후드득 떨어졌다. 소명의 손은 잠시 허공을 배회하다 무연의 메모집을 집어 들었다. 침대에 기댄 채 소명은 새카만 표지의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숲으로 갔다. 삶의 정수를 마시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들은 모두 버리고. 삶이 다했을 때, 그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으리라. ‘
첫 장을 쥔 소명의 손이 덜덜 떨렸다.
“미친 소리. 미친 소리.”
소명은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소명은 무연을 버릴 수 없었다. 도저히 무연을 잊고 살 수 없었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무연을, 또 소명을 미워하려고 해 봤지만 영영 불행할 수는 없었다. 무연은 영원히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이어서는 안됐다. 소명은 무연을 그렇게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기억해서는 안됐다. 언젠가는 무연을 그려야 했다. 숲 한가운데 자유로운 무연을 그려야 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허무와 죄책감이 비웃더라도, 소명은 무연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연 때문에 그림을 버릴 수는 없었다. 소명은 그림을 버릴 수 없었다. 소명은 다음 장을 넘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