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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Jan 03. 2021

쓰레기를 훔치다.

6. 어느 시인

  강우는 우체국의 소박한 바쁨이 좋았다. 그곳에는 소포를 몇 백번은 부쳐본 듯 한 전문가와 우체국은 처음이라 허둥대는 초심자가 한눈에 가려졌다. 강우는 익숙한 쪽이었다. 대부분의 원고는 메일로 보내지만 몇몇의 출판사에서는 실물을 요구했다. 강우도 종이가 좋았다. A4용지보다는 원고지가 더 좋았다. 촘촘하게 짜 놓은 칸에서 강우는 착실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강우의 주변 사람, 그러니까 지금까지 만나고 헤어졌던 애인들을 비롯하여 같은 학과 친구들은, 강우가 마냥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면은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우의 어떤 면은 완전히 반대였다. 강우는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선도 그냥 선이 아니라, 건축물의 설계도처럼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선이었다. 강우는 글을 쓰면서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계획 없이 휘갈긴 글자들은 아플 뿐이었다. 

"빠른 걸로 하세요?"

"네."

원고를 부치는 것은 늘 이상한 간지러움을 동반했다. 누군가 강우의 글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간지러웠다. 지금은 꽤 괜찮아진 편이었다. 처음 강우의 글을 건네줬을 때에는 정말 창피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이야기를 봐달라고 떼쓰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강우는 해가 지는 것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해는 시시각각 잠겨갔다. 갑자기 온 하루가 꿈같이 느껴졌다. 앞으로 강우의 날들은 오직 이 시간이 전부일 것 같았다. 강우는 골목 쪽으로 돌았다. 골목으로 들어가자 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층짜리 건물 사이에는 이미 어둠이 짙었고,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집까지는 가로등이 여덟 개였다. 가로등 사이사이가 꽤 멀었다. 여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골목. 강우는 중얼거렸다. 강우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빛에 비친 동그란 머리가 오렌지색이었다. 어쨌든 저렇게 대충 반 묶음 머리를 하는 것은 소명밖에 없었다.

"언니!"

소명은 뒤를 휙 돌아봤다. 소명의 머리가 다시 흑색이 됐다. 소명은 강우가 달려오는 것을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소명의 가방이 묵직해 보였다.

"언니, 이제 집 가? 과외 끝났어?"

"응. 너도 이제 들어가는 거야?"

"뭐 좀 부치느라 우체국 다녀오는 길."

"우체국? 나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강우는 소명이 우체국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떠올렸다. 소명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하는 일도 당연하게 해 낼 것 같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소명의 전화가 울렸다. 기본 벨소리. 소명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우는 소명의 곤란한 눈빛을 보고 살짝 뒤로 떨어졌다. 소명이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고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언니 아직 연락 안 했다며!"

소명이 한쪽 귀를 살짝 막았다.

"아, 내가 좀 바빴어."

"홍시 화실이야. 알지? 검색은 해 봤어?"

"홍시.. 화실? 어쨌든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바빠서."

소명은 전화를 꾸역꾸역 끊었다. 동생인 것 같았다.

"홍시 화실이라고 했어? 거긴 왜?"

"어?"

강우는 다시 소명의 옆에서 걸었다. 

"거기서 나 모임 하는데. 여자들 우글우글 모여서."

홍시 화실은 강우가 예술 부흥 모임을 갖는 곳이었다. 모임이라고 해 봤자, 코딱지만 한 화실에 모여서 농담 식 푸념을 하고, 술이나 마시지만.

소명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을 꾹 누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강우는 일부러 조금 천천히 걸었다. 소명은 너무 말이 느렸다. 소명은 천천히 말했다. 

"세상이 좁나? 자꾸 겹치네."

강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지?"

"응? 그럴 리가."

강우의 물음에 소명의 표정이 풀렸다.

"그런 생각 안 했어."

"언니, 거기 갈 거야? 같이 가자. 나 거기 아는 사람 많아."

"화실은 안 가."

소명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우는 소명의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는 벌써 어두웠다.

"그래. 그럼."

다음 가로등에서 본 소명은 웃고 있었다. 

"강우야, 너 로브 예쁘다. 진짜 잘 어울려."

뜬금없는 소명의 칭찬이 강우는 왠지 서운했다. 이유는 몰랐다. 그런 자기가 무례하게 느껴졌다. 강우가 말이 없자, 소명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너 머리가 가로등 때문에 주황색이야. 처음에 너 못 알아봤다니까."

"나도 언니 머리 보고 그 생각했어."

강우는 소명의 다정한 담장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강우는 집에 뭐가 있었는지 떠올렸다. 소명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할 셈이었다. 강우가 제안하기 전에 소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 밥은 먹었어?"

강우는 집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에 걸음을 멈췄다. 야구모자를 뒤집어쓴 승희가 강우와 소명 쪽을 향한 채 서 있었다. 강우의 손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소명도 승희를 봤다.

"저거. 승희 오빠..."

"야, 차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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