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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Dec 07. 2020

쓰레기를 훔치다.

2. 뒤돈 채 되돌아가는 길

주희가 문을 열었다. 

"아, 언니. 왔어?"

지나치게 그대로였다. 기억이 겹겹이 쌓인 현관의 냄새도, 신발장 위에 걸린 정체불명의 그림도, 2년 전과 같았다. 주희의 머리칼이 빡빡 밀려 있지 않았다면, 소명은 집을 등지고 나와 분투했던 시간들이 꿈같았을 것이다.

"머리 잘 어울린다."

주희는 화사하게 웃으며, 까끌까끌한 자신의 정수리를 꾹꾹 눌러 만졌다. 반삭을 한다면, 소명이 가장 먼저 할 것 같지 않냐며, 깔깔거렸던 한밤이 떠올랐다. 소명은 주희에게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의 안을 힐끗 본 주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 어디서 구했어?"

얼른 책을 집어, 앞 뒤로 확인하는 주희를 보자 웃음이 났다.

"아는 사람이 출판 일을 하거든."

"집에 왔으면 왔다고 인사를 해야 될 것 아냐?!"

웃음은 곧 사라졌다. 아버지의 음성은, 2년 전보다 건조했고, 갈라졌지만, 여전히 소명에게 여러 번 베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누군가, '들어와'라고 먼저 말하기 전에는, 집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저주에 걸린 것 같이, 소명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희는 멈춰버린 언니를 바라보다 곧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와. 빨리."

소명은 주희의 손에 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가 소명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게 얼마만이니? 밥은 먹었어?"

소명은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며, 대충 대답했다.

"소명아, 너네 동생 머리 좀 봐라. 이게 뭐니?"

어머니는 주희의 머리에 대해 하소연하다가, 소명이 반응이 없자,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막상 아버지는 소명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곧장 무연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제 무연의 방은 창고나 다름없었다. 겨울에나 꺼내는 전기장판처럼, 쓰지 않는 물건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곳곳에 무연의 물건이 보였다. 소명의 것도 있었다. 둘은 오랜 시간 같은 방을 썼으니까. 소명이나 무연의 물건이나, 이 집에서 마찬가지의 처지였다. 소명은 무연의 메모집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나무 책상에 딸려 있는 서랍장의 두 번째 칸이었다. 새카만 표지의 손바닥만 한 메모집. 소명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집에 온 이유였다. 소명은 두꺼운 표지에 새겨진 'andus'라는 글씨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먼지가 묻어났다. 언젠가 소명이 뜻을 묻자, 무연은 건조하게 대답했었다. 한글 무연을 그대로 영타로 쓴 것이라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그래서 요즘 뭐하냐?'"

아버지가 식탁 위의 침묵을 깨고, 한마디를 꺼냈다. 어머니도 그제야 맞장구를 치며. 소명을 쳐다봤다. 주희는 반찬에만 눈을 콕 박고, 식사를 했다. 

"아르바이트하고, 자격증 시험공부도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그게."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아버지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소명을, 그리고 주희를,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마지막에는 늘 어머니의 얼굴에서 맴돌았다. 

"소주 좀 꺼내와."

어머니가 소주와 술잔을 가져왔다. 소명은 소주병을 벽에 던져, 깨 버리는 상상을 했다. 어머니는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어머니 말고는 아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부모님은 소명에게 집에 들어오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만 스무몇 해를 길러 온 차녀를 큰딸에 이어 잃을 수는 없기에, 명절이나 집안일이 있을 때에 연락을 해왔다. 소명은 그들이 이미 모든 딸을 잃었다고 믿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식농사를 망쳤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녀를 잃고, 소명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돌연 자퇴한 뒤,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막내딸만은 당신들에게 다정하고 세심하나, 저렇게 삭발을 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아버지는 점점 큰 소리로 말했다. 소명이 대답하지 않자, 더 크게 말했다. 왜 이렇게 속을 썩이냐는, 딱히 거짓도 없는 이야기였다. 식탁이 들썩거렸다. 폭발한 것은 주희였다. 

"오랜만에 언니도 왔는데, 도대체 왜 그래?"

주희는 아버지의 소주병을 낚아채서 싱크대에 부었다. 알코올향이 훅 끼쳐왔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너 버릇없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서 주희를 밀쳤다. 소명은 어머니가 아버지 눈치를 볼 때마다,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실제로 몇 번 그러기도 했다. 어머니는 무연의 눈치도 봤고, 소명의 눈치도 봤으며, 이제는 주희의 눈치도 볼 것이다. 이 집에서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희를 쳐다봤다. 

"다들 미쳤구먼. 아주."

소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연의 메모집을 챙겼다. 

"저, 그만 가 볼게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소명은 집을 나왔다. 날 듯이 튕겨나갔다. 소명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다가 어느새 달음박질로 바뀌었다. 아직 한낮이었다. 소명은 꺼림칙한 하루의 시작을 기꺼이 만회할 것이다. 자, 이번에는, 마치 2년 전과 같은 이 순간에는, 무슨 다짐을 해야 할까?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 어떨까? 소명은 슬프지 않았다. 아버지가 두렵지도, 이 순간이 불행하지도 않았다. 소명을 괴롭히는 것은 적어도 힘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복에 겨웠다. 전부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자신은, 오히려 호화로운 사람이었다. 무연도 그랬는가? 땀이 흘러 소명의 입술에 닿았다. 주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명은 감전된 듯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숨이 차,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소명! 소명 언니!"

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희는 먼 골목에서 달려왔다. 소명이 멈춰 서 있는데도, 바로 앞에 다다를 때까지 소명을 불렀다. 

"왜, 뛰어가?"

주희는 두 손을 허벅지에 짚고, 호흡을 골랐다. 소명도 아직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공모전 나가봐."

소명의 마음이 크게 울렁거렸다. 

"내 친구가, 화실에 세입자 구한대."

주희는 연신 헉헉거리면서,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면 소명이 가버릴 것처럼, 급하게 말을 뱉었다. 

"번호 보내줄게."

주희는 소명이 아는 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애는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넘쳐나는 애정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소명도 주희를 사랑했다. 솔직하고 다정해서, 주희를 끝끝내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주희의 손을 꼭 잡고서, 소명이 말했다. 

"너 언니랑 갈래?"

주희는 민머리를 쓱 쓸어 넘겼다.

"하하, 이소명이 웬일이야?"

여름 태양은 작열하고, 소명은 살짝 어지러웠다.

"됐어."

땀범벅이 된 주희와 소명이 닮은 것 같았다. 주희가 여기까지 달려와 소명을 불러주어서, 소명은 동생을 사랑했다. 하지만 주희는 절대로 소명이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견뎌내야 했다. 소명은 손을 놓고, 주희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빳빳한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언니, 꼭 연락해 봐."

소명은 웃어 보이고, 뒤 돌았다. 덜 더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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