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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민 Jan 14. 2022

공중

아가씨, 여기를 밟으세요. 


하늘색 옷을 입은 시녀가 말한다. 바람은 계속 불어오는 중이다. 


노랑, 파랑, 빨강 순서로 밟으셔야 해요.


나는 그녀가 두 번째로 가리킨 발판이 파란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빛이나 옅은 바다의 색이다. 잠자코 몸의 무게중심을 노란색 발판으로 옮긴다. 불안하게 발판이 흔들린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까는 보이던 것들이 까마득하다. 밑은 숲인데, 숲 색 물결처럼 보인다. 우르릉 거리며 파도친다. 잠시 아찔해진 기분으로 허공에 손을 휘적이며 중심을 잡으려고 해 본다. 노란 발판은 나의 무게 탓에 살짝 가라앉는다. 이번에는 위를 올려다본다. 색색의 발판이 점처럼 허공에 박혀 있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는데, 끝은 아래보다 까마득하다. 시녀들은 아래와 위에서 나를 밀고 끌며 올리고 있다. 


자, 이번에는 파랑이예요.


그렇게 말한 시녀의 몸이 바람에 크게 휘청인다. 노란 치마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시녀를 밀어낸다.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추락한다. 마치 저물 때가 되어 저무는 개나리 꽃송이처럼 노란 치맛자락에 싸여 떨어진다. 나는 이미 세 명의 시녀를 잃었다. 


파랑이예요.


이번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시녀가 말한다. 나는 아래에서 충분히 멀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죽을 이유 없는 이의 죽음의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충돌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는 숨을 고른다. 나는 남은 시녀의 수를 자꾸 헤아려보고 그게 견딜 수 없이 비참하다. 오른발을 꾹 누르고 왼 발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파란 발판 위에 내려놓는다. 속으로 이건 파랑이 아니라 바다색이라고 되뇐다. 잡을 곳이 없어, 나는 죽기 싫은 마음을 버린다. 죽기 싫기보다 올라가는 마음을 가지기로 한다. 자, 이제는 해가 지고 있다.


아가씨,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흰 곳에 도착해야 해요. 


나는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채로 발판을 오른다. 목소리가 올라가라고 말하는 순서대로 오차 없이 발판을 오른다. 주위가 타오르는 붉음에 잠기는 것은 아주 잠시이고, 곧 어둠이 씌인다. 나는 바로 앞에 놓인 다음 발판만을 바라본다. 더 빠르게, 더 빠르게 오른다. 다음의 다음 발판에 발을 내딛자, 이제와는 다른 넓은 발판이다. 


하양까지 왔군요.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은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다. 나는 내가 딛고 있는 발판을 내려다보지만 그것은 어둠 속에선 하양이 아니다. 몸에 힘이 빠지고 쓰러진다. 아, 나는 죽을 뻔했을까? 이제 죽는 걸까? 어둠 속에서 익숙한 손길들이 내 머리칼을 매만진다. 시녀들은 내 옆에 붙어 앉는다. 바람은 잠시 잦아드는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치맛자락들이 마음을 감싸 온다. 


아침이 올 때까지, 눈을 붙이세요.


나는 긴장이 풀리지 않더라도 쓰러지듯 잠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란한 밤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로.


아침이다. 태양이 저쪽에서 떠오르는 중이다. 나는 발판이 정말로 흰색이었음을 확인한다. 곁에는 단 한 명의 시녀가 있다. 나는 다른 시녀들이 모두 어디로 갔음을 묻지 않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면, 그녀들은 나를 대신해 밤하늘을 날았을까?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흰 조약돌 같은 발판 위에 우뚝 선 채로 남은 여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흰 치맛자락이 날릴 때마다 다리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들이 보인다. 흰 치마에 핏자국은 배어들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시녀의 상처는 영영 없는 것일 테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진중한 눈동자에 새겨진 책임감을 본다. 짙은 눈썹과 각진 턱을 가진 그녀가 말한다.


아가씨, 여기부터는 발판이 없어요. 줄을 타고 올라가셔야 해요.


우리는 조약돌 위에 서서 위를 쳐다본다. 어디서 내려온 지 모르는 밧줄 하나가 허공에 덩그러니 늘어져 있다. 나는 이제껏 없던 목소리를 내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너도 가는 거야?


위를 보고 있던 흰 옷의 시녀는 나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나를 본다.


그럼요.


나는 시녀의 담담한 대답이 무척 아프게 느껴진다. 슬픈 것일지도 모른다.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를 뿐이다. 목이 건조해서 목소리가 갈라진다.


나 때문에 너도 올라가는 거니?


시녀는 치마폭에서 작은 물병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안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시녀는 물병의 뚜껑을 열고 다시 내게 건넨다. 내가 물병을 받지 않자, 시녀는 잠시 고민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밧줄이 애처롭게 흔들린다. 


아가씨가 올라가지 않으면,


그녀는 다정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죠. 늘 괴롭고, 슬프실 거예요.


시녀는 밧줄을 팽 하고 당겨본다. 까칠한 밧줄에 그녀의 손이 금방 빨개진다.


하지만, 너는 죽지 않겠지. 나도 마찬가지고.


시녀는 이미 줄에 올라 있다. 줄을 자꾸 당겨보고 흔들어보며 확인하는 중이다.


떨어질까 봐 무섭지 않니?


시녀가 줄을 흔들자, 바람에 치마가 날린다. 그녀의 다리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나는 몇몇의 상처에서 아직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잠시 후 그녀가 발판 위로 뛰어내린다. 잠시 발판이 살짝 가라앉는다. 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원하시지 않으면, 올라가지 마세요. 저는 떨어져 죽겠어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떨어져 죽는 것과 올라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답니다. 땅에 우리를 반기는 이가 없거든요. 계단 내려가듯이 다시 내려갈 수는 없답니다. 하지만 금방이에요. 저 위 말이에요. 아가씨가 떨어지기 전에 제가 잡아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주저앉은 채 땅이었을 공간을 내려다본다. 출렁이던 숲은 웅크린 작은 짐승이 되어 색색 거리고 있다. 어느새 시녀의 얼굴은 아주 오래 알았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느껴진다.


너는 누구지?

시녀는 나의 치맛자락을 펄럭이지 않도록 묶어준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손에 물병을 쥐어준다.


아가씨, 힘이 빠지기 전에 도착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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