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성좌원 시점 #4
작은 길 옆으로 교회가 있었다. 교회 옆엔 내가 서 있었다.
길도 사라지고 교회도 두 번이나 이사를 했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에 서 있다.
면구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세월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종을 매달고 있는 일은 깊은 수행을 하기에 탁월했다.
내가 그래도 한 때는.
이여사 : 아이. 오빠. 나 그런 얘기 고만 좀 들었으면 좋겠다.
장노인 : 아이. 그래도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면 한 때 내가 명동을 어드르케 주름잡았는가. 내 주먹에 전설이 있거든요.
이여사 : 솔직히 옛날에 잘 나갔던 주먹이면 뭐 해. 사람이 현재가 중요하지. 나도 옛날 사이다 공장 딸이에요. 우리 집에 머슴도 셋이나 있었고요. 상머슴. 중머슴. 얘머슴. 그래도 나는 그런 얘기 안 하잖아요.
장노인 : 선친께서 사이다 공장을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이여사 : 대전에서 했었어요. 대전 금강 사이다. 둘째 딸.
장노인 : 부잣집 따님이셨네.
이여사 : 사실 동대문 사단 애들이랑 칠대일로 싸워서 이겼다 한들 오늘날의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런 얘기는 자꾸 해봐야 오빠 인격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어떻게 하면은 남은 여생을 남들보다 더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가. 그런 얘기를 하셔야지. 제 말이 틀렸어요?
장노인 : 맞습니다. 근데 어떻게 하면 이 오빠가 남은 여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여사 : 그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춤을 한 번 배워보실래요?
장노인 : 춤?
이여사 : 세상이 달라져요. 어렵지 않아요. 간단해요.
- 드라마 '유나의 거리' 16회 중 김장을 도우러 온 이여사와 장노인의 대화.
그렇다. 오늘날의 나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되는 이야기를 해야 남은 생을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때의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다. 오늘날의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몸에 전구가 달렸다. 설치를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지만, 무엇보다 이번 일에서 중요한 건 녹이 슬어도 내 몸이 아직 쓸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데 있다. 길을 내며 잘린 풀 향기와, 종탑 끝까지 올라온 사람의 몸을 지탱하던 순간을 며칠 동안 되새겼다. 너무나 생생해 지금 벌어지는 일이지만 마치 과거도, 미래도 동시에 겪는 기분이었다. 척척 발을 걸쳐 올라온 사람은 내 몸에 전구의 끝을 묶고 내려가 여러 개의 나무 사이를 순식간에 지났다. 땅벌의 집을 건드려 혼비백산하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그다음 나무와 그다음의 나무 사이를 메워갔다.
그렇게 연결된 전구는 새로 만든 놀이터를 지나 두 번째 성좌교회까지 이어졌다. 처음에 온 사람이 나와의 거리를 잴 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했는데 9월 8일 저녁, 전구의 불을 켜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나까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했다. 이건 내 일이 아닌데, 왜 내가 이렇게나 좋을까.
거기. 나의 '건강과 보람'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가 벌인 일이 아니지만 나를 생각한 어떤 사람의 생각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오늘날'의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쩐 일인지 갑자기 위풍당당해졌다.
매일 종소리가 울리던 때를 자꾸 이야기하는 일은, 지금의 내 '격'에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 소리가 있어 지금의 환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2023년 8월과 9월에 쩌렁쩌렁 울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은 성좌교회는 이제 몇 나무들이 자리 잡은 모험놀이터가 되었지만 처음 울리던 종소리의 파장은 여전히 자두 열매를 익히고 도토리 속을 채우고 있다.
20년 전에 울리던 종소리에 맞춰 녹이 슨 몸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춤'을 추는 일이 오늘 밤쯤엔 가능할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