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요정 오소리의 요리하는 글쓰기 (2)
가끔은 정신수양을 위해 요리를 한다. 하나의 요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내가 들이는 시간은 농부의 땀과 땅의 결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채소를 다듬고 매만지는 과정, 썰고 가열하고 갈아내며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계속 애를 쓰는 시간 속에서 겸허함을 배우곤 한다. 아주아주 단촐하고 기초적인 자취생의 요리도구만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이 수고로움을 이겨낸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성이 많이 드는(이라고 고상하고 우아한 어휘를 쓰기엔 과다한 노동력이 투입되는 사실상 쌩 노가다임에도 또다시 해먹고 싶어지는) 요리 중 하나가 바로 당근스프다.
준비물: 당근(2-3개), 양파(큰것 1개 이상), 마늘 1-2쪽 (다진마늘로 대체하거나 생략 가능) 올리브유, 우유(최대 500ml), 소금과 후추, 치즈(생략 가능) 파슬리 등.
버터와 감자, 고구마, 단호박을 곁들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분량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모양과 맛이 날 때까지 적당량을 투하한다.
재료도구: 칼과 도마, 감자칼, 믹서기, 냄비, 주걱, (치즈 그라인더) 그리고 인내심. 인내심이 없다면 푸드프로세서(도깨비방망이)를 준비할 것.
1. 당근과 양파는 씻어 껍질을 제거한 뒤 채썰거나 다져 준다. (감자, 고구마, 단호박이 있다면 함께 다듬는다. 당근의 1/3 분량이면 충분하다)
이 때 당근을 자르는 이유는 부피가 작아야 빨리 익기 때문이며, 이후에 모두 갈아버려야 하기 때문에 균일하게 썰기 위해 집착할 필요는 없다.
2. 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둘러 예열한 다음 양파를 갈색이 될 때까지 볶아 풍미를 살린다. 이 과정을 캐러멜라이징이라고 한다. 카레를 만들 때에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중불 이상에서 바닥에 눌지 않도록 1) 수분을 날리고 2) 갈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열심히 팔 근육을 단련해 보자.
마늘이 있다면 타지 않도록 주의한다. 재가 된 마늘은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당근스프의 색도 망치고 쓴맛까지 난다.
3. 데워진 후라이팬에 버터를 적당량 녹인 다음 손질한 당근을 중불에서 볶는다. 마찬가지로 태우지 않도록 잘 섞으면서 당근의 숨이 죽을 때까지 볶는다. 마음이 급하다면 소금을 조금 쳐 준다.
버터가 없을 경우 올리브유로 대체 가능하며 가급적 당근과 양파를 따로 볶는 것을 추천한다. (순서는 상관 없다)
감자, 고구마 등을 함께 넣을 경우 당근과 같이 볶아준다. 기존에 쪄 놓은 것이 있다면 그대로 써도 무방하다. (볶은 감자와 찐 감자 중 어느 것이 더 맛있을지는 취향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4. 2~3에서 볶아낸 당근과 양파 외 모든 야채를 믹서기에 넣고 우유를 조금씩 부어 가며 덩어리가 보이지 않도록 곱게 갈아낸다.
푸드 프로세서가 있다면 스프를 끓일 냄비에 야채를 넣고 우유를 부어가며 갈아준다.
인간은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시간과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이 돈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5. 4에서 곱게 갈린 야채+우유 혼합물을 중-약불에서 저어주며 끓인다. 3번 단계에서 소금간을 하지 않았을 경우 다시 간을 보고 소금과 후추로 간한다.
좀 더 녹진한 크리미함을 원한다면 치즈를 그라인더로 갈아 뿌려주거나 마법의 가루인 파마산치즈 가루를 적당량 뿌려도 좋다. (아무 치즈나 넣으면 안된다)
6. 예쁜 식기에 담아내고 파슬리와 오레가노 등으로 꾸며준다.
요리가 주는 기쁨은 그 수고로움을 겪고도 맛을 음미하면서 비로소 보람을 느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순식간에 다 없어질 걸 알면서도 정성을 들이게 된다.
보드랍게 녹아드는 버터와 양파의 풍미와 당근의 포근포근함이 어우러져 몸도 마음도 따스하게 데워주는 할머니 담요같은 폭신한 맛, 너를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