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여백의 기술

나눌 때 보이는 질서와 집중

by 오석표

아침 도시락통을 닫기 전, 반찬 칸을 한 번 훑어본다.
김치의 붉은색이 달걀의 노란색 옆에 놓일 때,
작은 상자 안에도 균형이 생긴다.
칸을 나누면 보이기 시작한다.


현관 서랍엔 바구니를 두 개 놓았다.
왼쪽은 열쇠, 오른쪽은 카드지갑.
퇴근 후 손이 자동으로 그 칸을 찾을 때
하루의 어수선함이 빠르게 가라앉는다.


냉장고는 더 분명하다.
윗칸은 채소, 중간칸은 반조리, 아랫칸은 과일.
한밤중에도 문을 열면
먹어야 할 것과 미뤄도 될 것이 구분된다.
지나친 채움은 진짜를 가린다.
비우고 나누는 순간, 필요가 드러난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캘린더에 ‘생각 칸’ 30분을 고정으로 넣어둔다.
채팅과 메일 사이에서 튀어나가는 주의를
조금이라도 한곳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그 시간엔 화면을 닫고 노트를 펼친다.
네모칸 안에 할 일을 세 줄만 적는다.
여백이 남아 있어야
새로운 줄이 들어올 자리도 생긴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도 칸을 그린다.
왼쪽은 사실, 가운데는 해석, 오른쪽은 결정.
섞어 쓰면 말이 길어지고
나눠 쓰면 결론이 짧아진다.
여백이 있어야 의미가 선명해진다.


사람 사이에도 칸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의 간격을 조금 둔다.
서둘러 조언하기보다
상대의 문장을 다 듣고 한 박자 쉬기.
경계가 아니라 배려의 거리.
칸은 벽이 아니라 안내선이다.
넘지 말라는 선이 아니라
안전하게 다가가라는 길의 표시.


저녁, 식탁 위를 정리하며 생각한다.
오늘 내가 만든 칸들은
게으름의 변명이 아니라 집중을 위한 구조였다.
도시락의 작은 칸이 한 끼를 단정하게 지켜 주듯,
하루의 칸들도 나를 흩어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내일의 첫 줄을 위해
오늘의 칸을 한 번 더 손본다.
비우고, 나누고, 남겨 두기.
칸을 잘 만들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선택이 간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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