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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치관계 비전문가들이 말하는 양국관계 개선방안

<길거리의 일한론>

by 오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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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를 정치, 외교의 관점에서만 다루는 일부 전문가 집단이 전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한일관계 전체가 일부 전문가 집단(한일관계 전문 정치학자와 관료)에 의해 '납치'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몇 년 전부터 한일관계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수사다.


한일관계의 폭과 깊이는 10년, 20년 전에 비해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어졌다. 하지만 한일관계와 관련한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얼굴들이다. 정치, 외교 분야 전문가가 대다수인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도,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대일 강경책을 썼을 때도, 지금도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사상 최악의 한일관계론"을 설파하고 있다.


언젠가 암 치료가 하나의 거대한 비지니스로 변해, 암 전문 의사들이 수술이 필요하지 않는 환자까지도 수술을 하게 만든다는 내용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한일관계도 언제부터인가 일부 전문가들의 비지니스 무대가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은 한일관계가 나쁠수록 등판할 기회가 많아지고 주목을 받는다. 따라서 한일관계가 나쁜 것이 그들에겐 결코 나쁜 일이 아닐 수 있다.


나는 한일관계는 이전에 견줘 질과 양이 크게 달라진 만큼, 한일 정치외교 관계 전문가 집단의 역할도 필요하지만 그 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더 나아가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관여가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난 책이 <길거리의 일한론>(창문사, 2020년, 우치다 다쓰루 엮음)이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우치다 선생과 교류하는 행운도 얻었다.


우치다 선생이 엮은 이 책은 한일의 정치외교 전문가 집단과는 거리가 먼 열 한 사람의 일본인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느낀 한일관계, 또는 한일관계 개선 방안을 담고 있다. 매 번 비슷한 해법을 되풀이하는 정치외교 전문가 집단의 주장과 달리, 참신하고 생생한 얘기가 가득하다.


우치다 선생은 필자들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편지에서 "지금 한일관계에서 누군가 현명한 사람에게 '정답을 제시해주세요'라고 부탁하기보다도 끈기 있게 중단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명확하지 않더라도 입장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말을 골라 발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이 책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다.


우치다 선생의 이런 제안에 호응해 히라타 오리자(연극인), 시라이 사토시(정치사상), 와타나베 다카시(안전보장), 나카타 고(이슬람학자), 오다지마 다카시(칼럼니스트), 하토야마 유키오(정치인, 전 총리), 야마자키 마사히로(전사 연구가), 마쓰타케 노부유키(편집자), 이지치 노리코(인류학자, 제주도 연구가), 히라카와 다쿠미(문필가) 등 각계에서 활약하는 쟁쟁한 인물 10명이 자신의 생활이나 분야에서 느낀 한일관계에 관한 단상과 문제의식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각자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뀔 수 있는 논리를 찾기는 어렵지만, 모든 글의 밑바닥에 각 분야에서 상호 이해를 깊게 해가는 것이 최고의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시각이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다.


우치다 선생의 글을 포함해 11편의 글을 일일히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읽으면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몇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체론>으로 한국에도 알려진 시라이 사토시 교토세카이대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가 진전되면, '친일 비판'의 사회적 역할은 끝날 것이다. 그러면 이른바 '반일 내셔널리즘'의 출현도 적어질 것이고, 일본 근대의 행보에 대한 내재적 이해의 가능성도 넓어질 것이다. 그때 한일 양국민은 상호이해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단, 우리 일본인 쪽이 그런 용의가 가능하다면."이라고 말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피해자 쪽이 그만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사죄를 하는 '무한 사죄론'이 한일 사이의 역사갈등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강조하며, 이것은 우치다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전했다. 히라카와 다쿠미는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내면화해 가지고 있는 차별의식은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을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털어낼 수 없는 상황을 방치해온 것에서 비롯됐다는 게 나의 가설"이라고 말했다. 이 외의 필자들도 모두 흥미 있는 경험담과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다.


우치다 선생이 쓰거나 엮은 책 가운데 20여 권이나 국내에서 번역 출판됐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아직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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