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지상주의'는 좋은 정치를 보장하나.

여론, 세론, 여론조사

by 오태규

일본에서는 요즘 세론(世論,せろん)이라고 쓰고 여론(輿論,よろん)이라고 읽는 것이 보통이다. 각 신문에서 실시하는 세론조사가 대표적이다. 모든 신문이 '세론조사'로 쓰고 '여론조사'로 읽는다. 그러나 메이지시대까지만 해도 세론과 여론은 엄격하게 구분해서 썼다고 한다. 영어로 하면, 세론은 public sentiments, 여론은 public opinion이다.


여론은 '천하의 공론'으로 존중해야 하는 의견인 데 반해, 세론은 '외도의 언론, 악론'으로 배척해야 하는 의견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이것이 점차 경계가 흐려지면서 여론이나 세론이나 같은 뜻의 말로 변했다. 사토 다쿠미 교토대 교수는 그의 저서인 <여론과 세론, 일본적 민의의 계보학>(신조선서, 2008)에서 일본의 전후 역사는 '공론의 세론화' 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대중여론 조작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나라에서는 애초 세론과 여론의 구별 없이 여론이란 단어만 써왔다. 영어로는 public opinion으로 옮기지만, 현재 사용되는 뜻은 public sentiments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는 공론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론조사가 공론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서를 조사하는 것에서도 이 말의 뜻이 지금 어떻게 쓰이는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문제는 대중정서로서 여론을 중시하는 풍조가 정치를 열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떴다방'처럼 등장하는 각종 여론조사가 이런 풍조를 조장한다. 선거에서 단 한 표라도 아쉬운 정치 지도자들은 공론에서 나온 정책보다 대중정서에 영합하는 정책에 매력을 느끼기 쉽다. 언론(신문, 방송)이 이런 대중추수주의, 포퓰리즘의 폐해를 지적하고 공론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이 무분별하게 여론조사를 퍼나르며 국민정서 의존증을 조장하고 있다. 더구나 그냥 퍼나르는 데 그치지 않고 '묻지마 편파성'을 발휘하니 최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정치 지도자는 공론과 대중정서 사이에서 간장감 있게 균형을 잡아가면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도자가 저절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옥석을 가려줄 수 있는 공정한 심판, 즉 공정한 언론이 존재해야 한다. 공정한 언론이 없을 때는 최후의 보루로 '깨어 있는 시민'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그래서 깨어 있는 것은 고단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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