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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재일동포 사형수의 '조국 사랑' 수난기

<서대문형무소 묵시록>

by 오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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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을쯤 쓰보이 효스케 한난대 교수가 재일동포 출신의 70대 소프라노 가수 김계선씨와 관련한 책을 냈다면서 김씨와 함께 총영사관으로 찾아왔다. 이 책의 제목은 <노래는 분단을 넘어>(신천사, 2019년 3월)로, 김씨가 야기니쿠 가게를 하면서도 끝까지 노래를 포기하지 않고 노래 공부를 한 뒤 한일 화해와 남북분단 극복을 위해 봉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이 책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회를 잡아 전할 생각이다.)


쓰보이 교수는 오사카에 있는 마이니치신문사 계열의 지역방송사 <마이니치방송, MBS>의 독일 베를린 특파원을 지낸 저널리스트 출신이다. 베를린 특파원 시절에 독일이 과거사에 어떻게 반성하는가를 현장에서 보면서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독일 기자들이 면전에서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얘기를 듣고, 일본의 과거사 처리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총영사 임기 막바지에 작별인사 차 다시 찾아왔다. 재일동포와 관련한 책을 한 권 쓰고 있다고 하면서 책이 나오면 보내주겠노라고 말했다. 12월 초쯤 <서대문형무소의 묵시록>(카모가와출판, 2021년 11월)이란 무거운 제목의 책이 국제우편으로 도착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강종헌씨에 관해 쓴 책이다.


지난 번에 소개했던 <장동일지>가 사형수였던 이철씨가 직접 자신의 얘기를 쓴 책인 데 견줘, 이 책은 쓰보이씨가 기자 시절부터 10여년 동안 인연을 맺고 취재해오던 또 다른 사형수 강종헌씨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 것이다. 즉, 한 재일동포의 이야기를 통해 70년대 유신 시절부터 최근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더듬은 책이다.


두 책은 재일동포 유학생이 엄혹한 시절에 조국에서 겪은 고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서술 시점은 1인칭과 3인칭으로 전혀 다르다. <장동일지>가 개인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하고 있다면, <서대문형무소의 묵시록>은 강씨의 삶을 매개로 당시의 한국 엄혹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서대문형무소의 묵시록>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는 일본 사람들에게 군사독재에서 민주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가르쳐주는 좋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강씨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와 하숙집, 개성 등을 함께 여행하면서 수감 당시의 강씨의 생활과 생각, 당시의 사회 환경, 여행 당시의 사회 상황과 강씨의 심정을 종횡으로 엮으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물론 서술의 중심에는 항상 강씨가 있다.


강씨는 오사카의 명문고인 텐노지고를 졸업한 뒤 조국을 알기 위해 한국에 유학해, 서울의대에 입학한다. 1975년 간첩조작 사건에 휘말려 사형선고를 받고 13년 간 복역한 뒤 88년 가석방된다. 사형수로 언제 사형장의 이슬이 사라질지 모르는 긴박한 수감 생활 중에 의사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석방된 뒤에는 일본에 돌아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국제정치 공부를 시작한다. 이때 나이가 51살이었다. 5년 만인 56살에 박사학위를 딴 뒤 와세다대, 오사카대, 도시샤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한일관계, 남북관계, 북일 및 북미관계 등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서 수감생활과 그때 깊어진 조국통일에 관한 관심이 의사에서 국제정치 전문가로 삶의 방향을 틀게 했다.


강씨는 한국 유학 44년, 출옥 27년 만인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드디어 '사형수의 멍에'를 벗는다. 이때가 64살이다. 24살 때 옥살이를 시작했으니 40년 만의 해원이다. 이어 2019년 오사카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재일동포 유학생 간접조작 사건에 관한 사죄 발언을 듣고, 2021년에는 수감으로 제적됐던 서울대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는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강씨는 70살이 다 되어 쏟아진 이런 상황을 "계속 경기에서 지던 선수가 패자부활전에서 승리를 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우직할 정도로 재주 없는 사람들의 끈질긴 불복종에 의해 발전돼 왔다고 본다면서, "나는 앞으로도 우직한 생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한 재일동포의 기구한 삶을 다룬 이 책 여기저기에 오사카총영사관 또는 나와 관련한 얘기가 산재해 있어, 더욱 친근감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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