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두툼한 소설을 읽었다. 719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니 벽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작가 쓰지하라 노부루가 1711년에 있었던 제8차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배경으로 쓴 대하소설 <타타르의 말>(논형, 2017년 10월, 이용화 옮김)이다.
이 소설을 보자마자 너무 두꺼워 기가 질렸다.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소설이 조선시대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조선통신사는 내가 근무했던 오사카총영사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대마도까지만 왔다 간 마지막 12번째 방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사카총영사관 관할지역을 지나갔다. 2회째는 교토까지만 갔고 나머지 10차례는 모두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왕복했다. 오사카총영사관 관할지인 시가현이 고향인 아메노모리 호슈가 이 소설에서 주요 인물의 한 명으로 나오는 것도 흥미를 끌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실제로 1711년에 있은 8차, 1719년의 9차 조선통신사 때 수행을 한 바 있다.
이 소설은 1711년 조선통신사 방문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쟁점과 사회상에 관해서도 당시 상황을 사료 등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로 파견됐던 인물도 정사(조태억), 부사(임수간), 제술관(이현) 등은 실명으로 나와 있고, 통신사가 에도로 가는 과정에서 곳곳에서 대접 받고 문화교류를 하는 장면도 사료를 바탕으로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있는 듯한 임장감을 준다. 오사카나 교토, 시가 등 익숙한 거리와 장소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나올 때는 내가 마치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조선통신사 공부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조선통신사의 방문 중에 벌어진 살인 사건을 계기로 확 바뀐다. 조선통신사가 방문할 때까지는 주인공인 쓰시마의 가신 아비루 카슨도(조선이름 김차동, 조선통신사의 일본 쪽 경호대장 보좌)와 조선통신사 군관총사령인 류성일 사이의 국익을 건 싸움이 주로 펼쳐진다. 일본과 쓰시마의 이익을 위해 위법도 마다하지 않는 아비루와 조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는 류성일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다가, 결국 류성일이 일본에서 아비루에게 살해된다.
이 사건 뒤 아비루가 조선에 도망가 조선 여자와 결혼해 도공으로 살면서, 이야기는 조선통신사 중심에서 중국 서역에 사는 명마인 한혈마를 구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쓰시마가 에도 막부에 20만냥의 부채를 가지고 있어 파산 직전에 몰린 쓰시마번이 새로 8대 쇼군이 된 도쿠카와 요시무네가 한혈마를 간절하게 원하는 사실에 착안해, 명마를 구하주는 대가로 부채를 탕감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에 사는 아비루에게 찾아가 명마를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아비루는 고민하다가 이를 받아들이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몽골의 타타르까지 가서 타타르 말을 구해 일본에 건네준다. 그러나 쓰시마를 위해 일해 달라는 부탁은 거절하고 다시 조선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대략의 줄거리다. 따라서 전반부가 조선통신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소설의 성격이 강하다면, 후반부는 명마를 구하기 위한 모험 소설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책 전편에 흐르는 주제는 국경을 뛰어넘어, 민족을 뛰어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대 조선외교가 쓰시마번과 에도 막부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는 탓에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모티브를 둔 소설이지만, 민족주의로 쉽게 후끈 달아오르는 최근의 한일관계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역시 문학은 사회과학이나 정책 담당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매력이 있다. 누군가 '소설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소설이 할 일이 많이 있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