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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엘리트 집단'의 뿌리

<제국대학의 조센징>

by 오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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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을 이끌고 갈 관료 및 엘리트 육성을 목적으로 1986년 포고된 제국대학령에 따라, 일본 각지와 식민지에 차례를 제국대학을 설립했다. 1886년 도쿄제국대학으로 시작으로, 교토(1897년), 도후쿠(1907년), 규슈(1910년), 홋카이도(1918년), 경성(게이조, 1924년), 대북(다이호쿠, 1928년), 오사카(1931년), 나고야(1939)에 9개의 제국대학이 들어섰다. 설립 순서에서 경성제국대학이 대만의 대북, 오사카, 나고야보다 앞서 6번째로 세워진 것이 눈길을 끈다.

이들 제국대학에는 학문 또는 출세를 위해 일본 학생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도 입학했다. 일본 본토에 있는 7개의 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은 대략 784명이고, 정식 학사는 아니지만 선과, 전수과, 위탁생 등의 신분으로 과정을 이수한 사람과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1천명이 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본토 안의 제국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에 1942년까지 총 629명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까지 합치면, 2000명 안팎이 된다. 이들이 당시 조선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면서 해방 뒤 남북의 엘리트 집단의 기원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해방 뒤 남북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설계 및 집행자로 동원되어,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들 일본 제국대 출신 엘리트 집단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마니스트, 정종헌 지음, 2019년)은 "1000여명이 넘는 그들 집단의 면면을 불러내어 제국대학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밝혀내겠다는 저자의 결의에서 나온 노작이자 문제제기 작이다. 저자는 "일본 본토의 일곱 개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을 전수조사하자!"는 굳은 결심 아래 작업을 시작했으나, 시간의 한계 등으로 도쿄와 교토제국대 졸업생 중심으로 책을 내게 됐다고 밝혔다. 비록 모든 본토 제국대학 출신자들을 망라하지는 못했지만, 제국대학 출신자와 해방 후 한국사회의 관련성에 주의를 환기했다는 점만으로도 크게 평가 받을 만하다.

저자는 박사후 과정으로 교토대에 1년 연구를 하면서 제국대 유학생 자료를 뒤졌다고 한다.

"매일 오전 교토대학 교사 자료실에 앉아서 '학생일람'을 한 장씩 넘겼고, 오후엔 부속 도서관으로 옮겨가 <교토대학졸업생 씨명록>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뒤졌다. 식민지 때 간행된 <동창회보>와 패전 이후 작성된 동창회 명부도 대조했다. 이러한 날들이 쌓여 유학생 명단을 추출해서 각각의 삶의 이력을 채워 넣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자료와 싸움하는 저자의 고투가 눈에 선하다. 한 대학만 해도 이런 지경이니, 1년 안에 7개 대학의 조선인 유학생 자료를 다 뒤지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조선인 청년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제국대학에 들어갔고, 무엇을 배웠고,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어떤 삶을 지향했는지 등에 관해 자료와 인터뷰 등을 토대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 제국대학의 일반적인 모습과 함께 멸시 받는 '조센징' 유학생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책 가운데 현재 한국의 에리트 가문이 제국대 출신의 선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제국대 출신 졸업자들이 해방 뒤 남북 양쪽에서 새 국가 건설의 주역이 됐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이회창 전 총리, 이수성 전 총리, 김상협 전 총리, 이재후 전 김앤장 대표변호사 가문 등이 다 제국대 출신의 선대와 연결돼 있는 것을 보고 한 번 형성된 엘리트 집단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강한지를 알게 됐다. 또 물론 이념 성향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제국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남북으로 갈려 체제 경쟁의 기수가 됐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같은 교토대 출신으로 아주 드물게 모교의 교수직에 올랐던 이태규와 리승기가 해방 뒤 각기 남북으로 갈라져 영웅 대접을 받은 것이 좋은 예이다.

이 책에는 당시 도쿄제대와 교토제대에 다녔던 조선인 유학생 명부가, 이름, 학부, 학과, 졸업연도, 출신고, 출신지, 주요이력으로 분류되어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저자가 도쿄, 교토대학에서 공식으로 나온 졸업생 명부 및 학생일람, 동창들이 발행한 명부, <친일인명사전>, <사회주의인명사전> 등 각종 인명사전과 총독부 직원록, 각종 회고록을 종합하여, 새로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후속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

당시 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경성제대 포함)이 최대 2천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후대에 끼친 영향력은 막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전체상 뿐 아니라 분야별로 더욱 깊은 연구가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뿌리를 알지 못하면 가지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 엘리트 집단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제국대 출신자들의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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