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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을 허용한 후보'의 이해하기 힘든 '토론 거부'

대선 후보 토론

by 오태규

요즘 장안의 화제 중 하나는 대선에 출마한 제일 야당의 후보가 후보 간 토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 나온 후보가 토론을 거부하는 것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형세가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굳이 위험 부담이 따르는 토론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때다. 마침 그 당에 요란스럽게 영입된 페미니스트 신지예라는 사람이 29일 그런 논리를 폈다. 앞서 가는 후보는 토론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지금 그 후보가 앞서 가고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런 국면이지만, 앞서가는 후보가 택할 수 있는 좋은 전략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치 권투 경기에서 판정에서 이기고 있는 후보가 의외의 케이오패를 불러올 수 있는 접전을 피하고 도망가는 전법을 구사하듯이 말이다.


둘째는 토론에서 이길 자신이 없을 때다. 토론을 해봤자 상대에게 밀릴 것이 뻔하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 않겠는가. 돈 내기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경기를 할수록 판돈을 잃을 것이 확실하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그 판을 거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선거는 1등만 의미가 있는 특수한 경기이므로, 토론 회피는 앞서 달리는 주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유효'한 카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과연 그런가 하는 점이다. 일주일이나 열흘 전이라면 야당 후보의 토론 거부 전략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만했다. 경주에서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확 달라졌다. 많은 조사에서 지지율 역전 현상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도 역전을 허용한 후보가 여전히 토론 거부를, 그것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하게 외치고 있다. 심지어 토론 상대에게 '같잖다'라는 상스러운 말까지 쓰면서 토론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게임의 관점에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다.


그는 처음에는 "당내 경선에서 16번이나 토론을 했는데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며 토론 무용론을 꺼내더니, 다음에는 '확정적 범죄자'와 토론을 할 수 없다고 상대 후보의 자질을 토론 거부의 사유로 들고 나왔다. 정책이 금세 바뀐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런 점이라면 오히려 토론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유권자의 판단을 받으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상대 후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같잖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너무 나간 것 같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다. 허접하고 상스러운 용어는 발화자 자신이 그 정도 수준임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선거라는 게임의 시각에서 토론 거부를 따져봤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관점이다. 토론을 거부하는 것은 유권자의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것이다. 장사에 비유하지면 어느 것이 좋은 상품인지 비교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지금 많은 유권자들은 최선이면 더 할 나위 없겠지만 차악의 후보를 뽑기 위해서라도 토론이 활성화되길 바라고 있다. 그 열망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고 있는 삼프로TV의 대선 후보 가상토론 방송의 조회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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