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학의 창을 통해 보는 격동의 한국사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by 오태규
20220104_1101201.jpg?type=w580

한 노인이 죽으면 그 마을의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경험의 폭과 깊이가 더욱 넓고 깊은 사람이 숨진다면, 없어지는 도서관의 수는 평범한 사람의 경우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 문학가 임헌영씨와 대담집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한길사, 2021년 10월)을 읽으면서, 임씨 안에 내장되어 있는 도서관의 용량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의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 비평가, 실천 운동가까지의 전 생애를 더듬고 있지만, 그와 씨줄날줄로 연결된 한국의 문학사, 사상사, 민족사, 인물사, 그리고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비평과 실천운동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과 일화만 늘어놔도 너끈하게 한국의 민주화투쟁사가 될 만하다.

유성호 교수는 "유년 시절부터 숙명적으로 격변의 역사에 내던져진 사실, 두 차례에 걸친 투옥, 문학뿐 아니라 역사 관련 연구소에 투신했던 경력, 학계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전위인 시민운동에 몸담아 오신 생애 등등이 소설보다 더 재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고 말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뒤 느낌과 다르지 않다. 임씨의 말대로 "국립대학을 세 군데(서대문, 광주, 대구교도소)나 다닌데다 남들이 상아탑에서 연구비 나오는 논문 쓰느라 바쁠 때 저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을 떠돌며 두 문제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제 전문가'로 스펙을 쌓았"으니 하나하나의 얘기가 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비극적인 한국의 현대사와 민주운동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담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은 '민족'이고, '분단의 극복'이다. 그의 일생은 분단 극복과 민족 주체성의 회복에 맞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민족문제연구소 시절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미화작업에 맞서 <백년전쟁>이라는 영상물 제작을 주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민족 주체성 회복과 분단극복에 맞춰진 삶은 그를 방해하는 군부독재 및 그 비호세력인 외세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귀결이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과 관련한, 두 차례의 투옥일 것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그는 중간에 뜻을 바꾸거나 변절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시종일관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갔다. 오히려 민족이라는 틀에만 갇히지 않고 국외의 동포 및 동포 문학, 세계문학 및 세계문제로 고민의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이런 점이 존경스럽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가운데 '변절'하거나 방향을 바꾼 사람에 관해 전혀 험담을 하지 않는 도량이다.

하지만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추궁을 한다. 특히, 춘원 이광수의 변절에 관한 준열한 비판이 눈길을 끈다. 그가 '일본의 괴벨스'라고 하는 일본 당대의 대표적인 문필가 도쿠토미 소호(1863-1957)와 '사실상의 부자관계'를 맺고 그의 비호를 받으며 친일적 문필활동을 했다는 지적은, 일본 문제에 관해서는 좀 안다는 나도 전혀 모르는 일이다. 자료와 사실에 기초한 비판이기에 더욱 통렬하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레미제라블>의 프랑스 작가 빅토로 위고를 꼽고,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베트남의 호치민을 든다. 그는 대담 중 몇 차례나 "작품뿐 아니라 나이들수록 더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 작가"라면서 빅토로 위고를 "내 최고의 문학적 멘토"라고 말한다. 또 호치민에 관해서는 "온화하고 소탈한 인품에 고매한 애민정신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세계의 정치인 중 내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인물 중에서는 함석헌씨와 리영희씨를 분단시대의 대표적인 '민족지성'으로 꼽는다. 여기서도 그의 취향과 지향성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출판, 비평, 정치, 사회운동 등과 관련한 얘기는 끝도 한도 없다. 그만큼 그의 활동범위가 넓고, 사색과 독서의 깊이가 깊다.

그는 대담 마지막에서 한국과 세계가 직면한 4대 위기로 자연재양이 가져올 인류 존망의 위기, 핵무기와 과학이 빚은 인간 절멸의 위기, 인간성 파괴로 말미암은 인간 소멸의 위기, 정치인들이 자초할 인류 생존권의 위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네 번째인 정치 바로잡기라고 말했는데, 대통령선거를 60일 정도 앞둔 시점에서 깊게 새겨볼 대목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나의 사상만 아는 것은 사상을 모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