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무라 다카시씨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으로 지금 일본의 진보적인 주간지 <슈칸 긴요비(주간 금요일)>의 사장이다. 2018년 9월부터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이 잡지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주간금요일>은 국민주 모금을 통해 1988년 창간된 <한겨레신문>의 아이디어에 자극 받은 일본의 유지들이 만든 잡지다. 경영이 어렵지만 기업 광고를 전혀 받지 않고 구독만으로 유지하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척박한 일본의 언론 풍토에서 고군부투하고 있다.
우에무라씨는 사장이 된 뒤 매주 권말칼럼 '평사장이 간다'를 쓰고 있다. 이 칼럼은 우에무라 사장이 화제가 되는 인물을 만나거나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해 쓰는 것으로 '밑바닥'을 중시하는 잡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우에무라 사장이 이 칼럼(2021년 4월 16일 발행, 통권 1323호)에 나의 일본어 저서 <총영사 일기>를 다뤄주기도 했다.
우에무라씨는 이 잡지의 사장이 되기 전에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아니 지금도 고통이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가 생존 '위안부'의 존재를 최초 보도한 기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실명으로 피해 체험을 폭로하기 바로 3일 전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 사회면 머리기사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서울에 거주하는 전 위안부(3일 뒤 김학순 할머니로 알려짐)로부터 청취작업을 시작했다'는 특종기사를 썼다. 이것이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위안부 사실을 부인하려는 일본 우익이 그를 상징적인 공격 표적으로 삼는 게기가 됐다.
<나는 날조기자가 아닙니다>(푸른역사, 2016년 9월, 길윤형 옮김)는 그가 우익의 악랄한 공격에 맞서 싸운 기록을 담은 책이다.
일본 우익이 그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생존 위안부 문제를 최초 보도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신을 깎아내리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즉, '메신저'(우에무라와 아사히신문)를 공격함으로써 '메시지'(일본의 위안부 사실)를 무력화하려는 우익의 전략에 따라 선택된 상징적 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우익의 표적이 된 것은 역사우수정주의가 기승을 부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2012년 극우 정치인 아베 신조가 2차 집권한 뒤 일본 사회는 역사인식의 '역코스'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위안부 동원과 관리에 관한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고, 위안부의 존재 사실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광풍처럼 일었다. 2014년은 그 정점이라고 할 만한 시기였다. 우에무라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시점이 우익 성향의 잡지 <주간문춘> 2014년 2월 6일호(1월 30일 발매)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에 대한 공격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는 그가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기사를 썼다는 것, 둘째는 기생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쓰지 않았다는 것, 셋째 장모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간부인 양순임씨여서 이해관계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엔 한국의 정대협(피해자 포함)뿐 아니라 한국, 일본 언론도 정신대와 위안부의 구별 없이 용어를 사용했다, 기생학교는 위안부 피해와 관련이 없다, 장모와 기사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조목조목 반박하지만 한 번 먹이로 정한 우익의 공세는 멈추기는커녕 도를 더해간다. 심지어 딸의 사진까지 인터넷에 올려놓고 '살해' 운운하는 비열한 공세도 벌인다. 그런 속에서 회사를 중도 퇴직하고 전직하기로 결정된 고베의 한 여대 교수직을 포기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시련은 사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단련도 시켜준다. 그는 자신에 대한 우익의 공세에 도망가거나 굴복하지 않고 명예훼손 소송 등으로 결연하게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의 소송에는 일본의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많은 지원자, 즉 변호사, 학자, 학생, 시민 등이 합류했다. 또 그도 소송을 계기로 원기를 되찾아 다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결의를 다지게 된다.
그가 소송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5년 8월 15일 망향의 동산에 있는 김학순 할머니 묘비를 참배하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는 묘비 앞에 노트북에 담아간 김 할머니의 실명 기자회견 영상을 틀어놓고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오랜 기간 참배를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신이 숨졌을 때 나는 특파원이었음에도 사망 기사를 담담하게 쓰기만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피해 증언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기자였습니다만, 장모가 유족회 간부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공격이 계속되어도 당신이나 위안부 문제에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다시 한 번 저널리스트로서 위안부 문제를 다뤄가고 싶습니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시련 속에서 더욱 성숙하고 단단해진 저널리스트 우에무라의 모습이 한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