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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Apr 18. 2022

'세대 프레임'에 쉽게 현혹돼선 안 된다.

<세대게임>, 플레이어, 대상자, 2030세대, 4050세대

최근 들어 선거 때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세대론'이다. 한국 정치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지역 구도'는 약화되고 '세대 구도'가 강화됐다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횡행하고 있다.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세대를 열쇠말로 한 분석이 주류를 이뤘다. 20대, 30대와 60대는 보수 성향이고 40대와 50대는 진보성향이라든지, 20대와 30대도 여성과 남성의 성향이 다르다는 분석이 대표적이다. 실제 투표 결과에서도 세대 별로 성향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제 선거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제를 대할 때, 세대 프레임은 거의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분석도구가 된 느낌이다.

내가 <세대 게임>(문학과지성사, 전상진 지음, 2018년 1월)이란 책을 책장에서 다시 꺼내든 것은 20대 대선 직전이었다. 대선 전에 세대 문제를 한 번 생각하고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대선 전에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대선 후에도 코로나 투병으로 바로 읽지 못하다가 대선이 끝난 지 거의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독서를 마무리했다. 시작과 끝 사이에 간격이 너무 길어 뒷 부분을 읽으면서 앞 부분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이 책만큼 세대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책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세대론은 우리사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한계도 뚜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세대 게임'이란 용어는 필자인 전 교수가 새롭게 뜻을 입힌 개념이다. 전 교수는 세대 게임을 "사람들이 세대에 주목되도록 판을 짜서 어떤 전략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하는 활동이나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세대 게임에는 세대 카드를 활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플레이어)과 그것에 농락 당하는 사람(당사자)의 두 부류가 있고, 플레이어는 비난할 세대를 내세워 문제 사안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방법(비난의 세대 게임)과 특정의 세대를 지지자로 만드는 방법(지지자 세대 게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에서 세대 담론이 남용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접근한다. 첫째는 정체성의 버팀목이 됐던 민족이 세계화와 함께 퇴색했고, 서구에서 힘을 발휘했던 계급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세대가 정체성의 공백을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둘째는 개념의 불명확성과 가소성 덕분에 세대가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됐다는 것이다. 세대 담론의 이런 성격 때문에, 세대는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됐다.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세대의 틀로 정의하고 특정 세대에게 책임을 묻고, 그 세대에게 벌을 가하거나 그들로 인해 손해를 입은 다른 세대에게 보상하는 식으로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그런데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세대 게임에서 이익만이 관심사일 뿐, 당사자들이  실질적으로 이익을 보고 안 보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세대 게임에 동원되는 당사자들은 세대 게임의 희생자가 되는 경우마저 종종 생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2016년 말의 촛불과 맞서 맞불을 이끌 던 세대에 관한 분석이다. 필자는 촛불과 맞불을 세대 게임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촛불이 모든 세대가 골고루 참여했다면 맞불을 60대 이상의 노인 세대가 참여했기 때문에 세대 대결로 볼 수 없고, 촛불은 법과 민주주의 파괴자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촛불과 맞불을 세대 프레임으로 만든 것은 법치와 민주주의의 프레임으로 해서는 승산이 없는 보수진영 플레이어들의 기획이고, 이런 기획이 성공을 거뒀다고 저자는 본다. 또 이런 성공의 배경에는 청년층을 선호하는 진보 진영의 노인 배제 전략이 도움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듬뿍 가지고 있는 이른바 '1970년대 시간 향우회' 성원들이 진보 진영의 배제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을 인정해주는 세대 프레임에 호응해 세대 게임의 열렬한 당사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진보진영이 가장 뼈 아프게 반성할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세대 게임과 '세대'라는 용어는 '나쁜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모두 '청산'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껏 세대 게임과 세대에 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저자의 답은 의외다. 그는 "내 답은 '미안하지만 아닙니다.'"라면서, "나는 세대가 가진 힘, 곧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로서의 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속화된 사회에서 세대는 시간 정체성의 표현으로서 그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라면서 세대를 활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집단과 세력의 준동도 더욱 강해질 것인 만큼 더한 조심성으로 경계해야 한닥고 주문했다.

아마 저자의 다음 말이 이 책을 쓴 이유이며 주제일 것이다. 

"세대 게임의 칸토레크들이 짜 놓은 세대들의 전쟁터에 참전하기를 의심하고 주저해야 한다. 적절히 의심하고 주저하기 위해서 세대가 커뮤니케이션 되는 방식과 그것의 전략적  측면, 곧 세대 게임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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