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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May 16. 2022

미디어에선 여전히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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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일본 사람의 정신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다. 즉, 천황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면서 헌법이 제국헌법에서 평화헌법으로 바뀌었다. 천황의 지위도 극적으로 변했다. 신적인 존재에서 인간(상징 천황)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대다수 일본 사람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천황이 신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키는 대표적인 세력이 아베 신조를 비롯한 우익 정치인들이다. 패전 이전의 황실 보도 관행을 이어가는 미디어도 그런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황실보도와 '경어'>(삼일신서, 나카오카 히로시 씀, 1994년 7월)는 지금도 시대착오적인 황실 보도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 미디어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책이다. 일본에서도 매우 희귀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아시히신문>에 미디어 비평을 쓰던  네즈 도모히코 교수(리츠메이칸대학 산업사회학부)의 글을 보고 알게 됐다. 책을 구하려고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중고책을 간신히 입수해 읽었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천황과 황실을 과잉, 찬미 보도하는 미디어의 행태가 독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쳐 전후에도 천황과 황실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도록 하는 정신구조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황실 보도는 1868년 15살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메이지 천황이 전국 각지를 순례하는 것을 기자가 수행해 보도한 것이 효시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미디어의 천황 및 황실 보도를 절대천황제를 구축하는 데 이용했다. 그런데 일본의 미디어는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인 지금도 이때 형성된 보도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천황이 즉위할 때 실시하는 신도 형식의 행사, 즉 대상제와 관련한 언론의 보도다. 일본 천황은 매년 새로운 곡식을 신에게 바치는 행사(신상제)를 하는데, 천황이 즉위한 뒤 첫 번째 하는 행사를 대상제라고 부른다. 대상제는 천황이 신이 되는 의미를 띤다고 한다. 이미 패전과 함께 '인간선언'으로 신격성을 스스로 부정한 천황이 대상제를 통해 '신권 천황'을 선언하는 셈인데도, 미디어는 이런 점을 전혀 비판적으로 따져묻지 않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이 책은 천황과 황실과 관해 과잉, 찬미, 무비판적으로 보도하는 미디어의 행태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가장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분야는 '경어(존경어)' 보도다. 일본 신문 및 방송의 보도 문체는 모두 평어이지만 아직도 유일하게 경어체로 보도를 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천황과 황실 성원이다. 예를 들어, 갓난아이에 불과한 황족도 윗사람에게 쓰는 '사마'라는 말을 붙여 보도한다.   


경어는 쉽게 말해, 상하관계를 보여주는 언어표현이다. 모든 사람이 법적으로 평등한 세상에서, 특히 언론자유 시대의 미디어 보도에서 특정인과 특정그룹만을 우대하는 표현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다. 실제 일본의 미디어계에서도 시대 변화에 따라 천황과 황실 보도에서 경어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고 일부 개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의 개선에 불과하다. 현재 황실 보도에서 경어 사용 폐지를 선도하는 신문은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인데 대다수 신문과 방송은 전전의 관행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황실 경어 보도의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핀다. 현 시점에서 단순하게 '경어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이 천황을 앞세워 벌인 침략전쟁에서 그를 보도를 통해 지원했던 미디어계가 전후에 철저하게 반성을 하지 못한 데서 나온 문제가 경어 보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경어 보도의 탈피는 미디어계가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과 이에 협조한 보도 행위에 관한 철저한 자기 반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미디어의 경어 보도는 어떤지 생각해 봤다. 2017년에 <한겨레>는 대통령 부인의 명칭을 '대통령 부인 000씨'에서 '000 여사'로 고쳐 쓰기로 방침을 바꿨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대통령 부인을 '씨'라고 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1988년 창간 이래 관례를 깬 것이다. 지금은 많은 미디어들이 당연한 듯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을 '김건희 여사'라고 쓰고 있다. 심지어 '영부인'이란 호칭을 부활한 미디어도 있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여사'라는 경칭의 사용은 역사의 후퇴다. 너나없이 '내로남불'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멀리, 길게, 높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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