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뉴스, 뉴스말, 문화방송, 민주화, 좋은 기사 연구모임
기자 출신이 대개 그렇지만 나는 세상 오만 것에 관해 관심이 많다. 그러나 굳이 관심사를 압축하자면, 저널리즘과 외교(특히 일본 문제)가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 출신 특임 공관장(오사카총영사)'이란 독특한 경험도 했으니 분수에 크게 어긋나는 관심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2021년 6월 오사카총영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 서울대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2021년 9월~)으로 활동하며 일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저널리즘과 관련해서는 올해 6월부터 관훈클럽의 소모임 활동 지원을 받아 '좋은 기사 연구모임'을 꾸려 활동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창립을 주도한 '죄'로 대표를 맡고 있다. 둘 다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럭저럭 양대 관심사를 추구할 얼개는 갖추고 있는 셈이다.
현재 '좋은 기사 연구모임'은 언론사를 퇴직한 저널리스트 30명(일부 현직 포함) 정도가 모여 활동하고 있다. 6월부터 두 달 간격으로 모임을 하고 있고, 이제까지 두 번 모임을 했다. 이 모임의 취지는 땅에 떨어진 한국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질 높은 기사'의 생산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경험 풍부한 고참 언론인들이 작은 목소리로나마 제기해 나가자는 것이다.
첫 번째 창립 모임에는 한국 저널리즘의 선진화 방안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좋은 저널리즘 연구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재경 이화여대 특임교수(저널리즘 교육원장)을 초청해, 한국 저널리즘 전반에 대한 문제를 듣고 토론을 했다.
8월에 열린 두 번째 모임에는 <문화방송> 보도국장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지낸 김상균씨를 초청해 한국 방송의 문제에 관해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주제가 독특했다. 방송 전반의 문제가 아니라 '방송말 뉴스 만들기'였다. '방송말 뉴스'는 그가 직접 만든 조어로, 한국의 방송 뉴스가 문어체 중심, 일반 사람이 쓰지 않는 권위주의 용어 중심이라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말이다.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사전에 만난 자리에서 그가 <누구를 위한 뉴스였나-기자 김상균의 방송뉴스 돌아보기>(나남, 2014년 11월)라는 책을 줬다. 455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고 모임이 임박한 상태여서, 이 책을 읽은 것은 모임이 끝나고 한 달여나 지난 뒤였다. 책을 읽고 나서야 모임 전에 읽었더라면 모임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뜻을 더욱 잘 이해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 책은 방송기자의 문제의식으로 가득한 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득권에 익숙해지기 쉬운데 끝까지 날선 문제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이 책은 방송기자의 책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을 '했습니다'라는 겸양체를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에게 말을 걸거나 설명해주는 느낌을 시종 받았다. 신문기자인 나는 모든 글을 '했다'라는 평어체로 쓴다. 이것만 봐도 그가 타고난 방송기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방송뉴스가 신문뉴스의 용어(말)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생긴 것은
1980년 해직기자로 지내면서 '시민의 관점'에서 방송뉴스를 관찰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87년 11월 <문화방송>에 복직하면서 그가 가장 많이 강조한 대목은 "방송과 신문은 다른 매체"라는 점이었다. 그는 "방송은 말로 하는 매체이지 신문처럼 글로 쓰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뉴스 자체도 달라야 한다"고 되뇌었다.
그의 방송말에 대한 생각은 단지 '구어체냐 문어체냐'의 수준의 넘어, 방송말은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데까지 발전한다. 다음은 책의 첫 부분인 '기자생활을 돌아보니'에 나오는 글이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인식이 점점 자리를 잡아갔으며, 이에 따라 '방송뉴스'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점점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저는 말로 하는 방송은 당연히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좋은 기사 연구모임' 발표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화훼, 폄훼, 촉법, 경질과 같은 권위적 용어가 아직도 방송에서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검찰 발 기사를 보면, 신병확보, 영장기각, 압수수색, 증거인멸 등 그들이 쓰는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영어를 자기 나라 말인양 자랑스럽게 쓰는 행태도 신랄하게 지적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바른 말, 바른 뉴스'라는 제목으로 묶인 12편, '서울에서 워싱턴까지'라는 제목에 들어 있는 16편, '역사로 남는 방송'에 들어 있는 20편의 글이다. 나는 이 세 부분 중에서 첫 부분인 '바른 말, 바른 뉴스'가 이 책의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런 생각을 다른 방송기자로부터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대통령 호칭과 관직 호칭, 수동태 문장, 영어로 된 뉴스 제목까지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지적하며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대단하다. <문화방송>의 약자를 영어로 <MBC>쓰는 것은 <일본방송협회(니폰호소쿄가이, Nippon Hoso Kyokai)를 <NHK>로 표기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광주문화방송> 사장 시절 뉴스 신호 음악에 우리 가락을 집어넣은 일은 통쾌함마저 불러일으킨다.
둘째와 셋째 부문도 한국 방송 역사와 방송의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내용이 많다. 지역 방송에 안주하지 않고 지역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밀어붙이는 노력은 현업자들이 본 받을 만한다.
문제는 한 조직의 변화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그가 현업 시절에 시도했던 개혁적인 시도와 일은 지금 거의 중단되거나 축소됐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노력도 없다면 변화의 씨도 생길 수 없다는 점에서 방송 저널리스트로서 그의 시도와 노력은 매우 소중하다.
그는 2차 '좋은 기사 연구모임' 때 대대수 기자들이 무심한 가운데 홀로 대화체, 구어체의 방송말을 꾸준히 사용하는 후배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런 기자 열 사람만 있으면 방송이 바뀌고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김 전 이사장의 책을 읽으면서 "진작에 이런 기자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의 방송이 크게 바뀌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