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 대안 진실, 트럼프, 브렉시트
2016년 영국의 옥스퍼드사전이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신조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이 해 영국의 유럽연합 이탈(브렉시트)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런 놀라운 사건의 연쇄가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탈진실이란 용어를 당대를 대표하고 규정하는 개념으로 끌어올렸다.
옥스퍼드사전은 탈진실을 올해의 용어로 뽑으며,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실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을 우선하는 현상, 즉 신념이나 감정에 따라 사실을 조작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트럼프는 선거운동 때뿐 아니라 당선 이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대통령 자격이 없었다거나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아동 매춘에 관여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취임식장 자리가 듬성듬성한 사진이 있는데도 자신이 취임식에 역대 가장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자랑했다. 트럼프는 집권 내내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대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여론을 조작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선거 때는 찬성론자들이 홍보용 버스 수백대를 동원해 영국이 유럽연합에 매주 3억 5천만 유로를 지급하고 있다는 허위 사실을 퍼뜨리며 브렉시트 찬성을 선동했다. 놀라운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에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찬성론자들이 탈진실을 이용해 정치적인 이익을 챙기자, 이후 세계 여기저기서 탈진실을 이용하려는 정치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미국)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이 쪽 팔려서 어떡하나"고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비하 발언'을 수습하는 과정은 급기야 탈진실 현상이 한국까지 본격적으로 진출했다는 걸 보여준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은혜 대통령실 대변인은 이 보도가 나간 뒤 15시간 뒤에야 '이 새끼'는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의 야당의원을 지칭한 것이고 '바이든'은 '날리면'을 잘못 들은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도 귀국 뒤 "사실과 다른 보도"라며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가담하고, 이에 국민의힘도 맞장구를 쳤다. 이런 언동은 사실을 자신의 정치적인 이해에 맞춰 진실을 비틀고 조작하는 '탈진실' 접근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포스트트루스-가짜 뉴스와 탈진실의 시대>(두리반, 리 매킨타이어 지음, 김재경 옮김, 정준희 해제, 2019년 5월)는 탈진실의 기원과 탈진신이 최근 부각된 배경, 그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살펴본 책이다. 탈진실 현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좋은 '구명정'이 될 만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탈진실 개념은 진실이 퇴색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감정에서 비롯됐다"면서 "탈진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정치계에서 사실과 진실이 위기에 처했다는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거짓, 프로파겐다 등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적어도 미국 정치무대에 '경험적인 믿음을 형성하는 데 사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관점은 2016년에 처음 등장했다고 말했다. 저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탈진실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탈진실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탈진실 현상의 기원은 수천 년 전에 인류가(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할 것 없이) 비합리적인 인지능력을 발달시킨 때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말한다. 다만 이것이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을 거치면서 크게 주목받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탈진실의 뿌리와 배경이 과학부인주의, 인지편향,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하나를 검토해 나간다. 과학부인주의는 폐암과 담배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담배회사들의 공작에서 시작해,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석유회사들의 움직임을 거치며 전방위적으로 확장됐다. 또 자신의 소망과 일치하는 것만 보려는 인간의 인지편향이 탈진실의 자양분이 되었다.
또 진보의 기획으로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에게 악용되면서 탈진실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접근법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인데, 이것이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객관적 사실을 부인하는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부인주의와 인지편향,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이를 확산하고 증폭하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없이는 한계가 있다. 인터넷의 도입과 발전에 따라 전통적인 미디어의 영향이 쇠퇴하고 그 자리를 소셜미디어가 치고 들어오면서 가짜뉴스의 파급력이 훨씬 강해지고 빨라졌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탈진실과 가짜뉴스 확산 방지를 위해 미디어 종사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탈진실과 가짜뉴스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저자는 먼저 '기계적 중립성은 속이려는 자들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어 가짜 뉴스가 유통되는 시스템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가짜 뉴스를 잡아내기보다 훨씬 더 많은 진짜 뉴스로 가짜 뉴스를 덮어버리라'고 말한다. 또 비판적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도 주장한다.
가짜 뉴스를 막기 위해서는 수용자의 능력도 중요한데, 이 책에 나오는, 한 미국 초등학교 교사의 '가짜 뉴스 판별법'이 이런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다. 1. 저작권을 확인하라. 2.여러 출처를 통해 확인하라. 3. 출처의 신뢰성을 평가하라. 4. 정보의 개시 일자를 확인하라. 5. 주제에 대한 지은이의 전문성을 평가하라. 6.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일치하는가를 확인하라. 7. 현실성 있는 내용인지 의심하라.
저자는 "분명 소셜미디어는 탈진실 현상을 부추기는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도 결국 도구일 뿐 그 자체로 결과는 아니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진 도구가 위험한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면 다시 그 도구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사실은 사실이다. 아무리 이야기를 꾸며내고 거짓말을 늘어놓고 허풍을 떨고 말장난을 친다고 해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서 사실의 중요성과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우리가 더 나은 뉴스 미디어를 원한다면 제대로 된 뉴스 미디어를 지원하면 된다"면서 '어떤 눈속임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사실과 진실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고 더욱 가열차게 벌여나가야 탈진실을 막을 수 있다는 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고 있다. "진실은 지금까지 늘 소중했고 앞으로도 계속 소중할 것이다. 제때에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