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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Dec 19. 2022

'지정학의 눈'으로 읽는 국제정치

<지리의 힘>, 서평, 시진핑, 중국, 한반도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3년 만의 한중 정상회담이었지만 회담 시간은 25분에 불과했다.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사진도 찍고 얘기를 나눌 때는 통역이 필요하니, 서로 공평하게 시간을 썼다고 해도 한 사람이 얘기할 시간은 12분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이 회담이 끝난 뒤 중국 외교부가 내놓은 회담 설명자료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한국 대통령실의 설명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시 주석은 "중-한은 이사할 수도 없는 가까운 이웃이자 분리할 수 없는 파트너"라며 "지역 평화를 지키고 세계 번영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광범위한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다"고 말했다." 

12분 정도밖에 안 되는 귀한 시간에 시 주석이 이런 말을 가장 먼저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표현은 점잖지만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니 우리와 잘 지내야 한다'는 으름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정학적으로 취약한 한국의 위치를 강조하며 반중노선을 취하고 있는 윤 대통령을 견제하는 말이다.

이 회담이 끝난 뒤 몇 일 뒤부터 <지리의 힘 1>과 <지리의 힘 2>(사이,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1권 2016년 8월, 2권 2022년 4월)를 연달아 읽었다. 어느 서점 누리집을 검색해 봐도 국제정치 및 외교 분야 책 중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길래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읽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그 시기가 한중 정상회담 바로 뒤였다. 시 주석의 고압적인 말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책을 읽는 동안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에 따른 생존 및 발전 전략의 제약을 더욱 깊이 느꼈다.

이 책을 쓴 팀 마샬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해외 특파원 및 외교부 출입기자, <비비시(BBC) 기자로 일하면서 30년 이상 국제 문제를 다뤄온 저널리스트다. 직접 세계 주요 분쟁 지역에서 취재한 경험이 풍부하다. 따라서 학자들이 쓴 딱딱한 이론서와 달리 생생한 현장감과 알기 쉬운 문체로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세계 정세를 설명해주고 있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지었다면, '지리의 힘'보다는 '지정학의 눈으로 보는 세계사'라고 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1권과 2권의 출판 연도는 6년 정도 차이가 난다. 1권이 2015년에 <PRISONERS of GEOGRAPHY-Ten Maps That Explain Everything about the World>라는 이름으로 출판됐고, 2권이 2021년 <Prisoners of Geography- Our World Explained in 12 Simple Maps>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1권이 Scribner Book Company, 2권이 Experiment로 각기 다르다.

1권과 2권은 지리를 통해 세계 정세와 지역 정세, 각국의 과제와 전략을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1권이 러시아, 중국, 미국, 유럽, 중동, 아프리카, 인도와 파키스탄, 한국, 라틴 아메리카, 북극 등 커다란 지역을 중심으로 쓰여졌다면, 21년에 나온 2권은 냉전의 붕괴 이후 다극체제가 강해지고 중국의 힘이 커지는 것을 반영해 그런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10개 나라와 지역 및 공간을 다루고 있다. 2권에는 1권이 나온 뒤  6년 동안 벌어진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트 대통령 등장 이후의 미-중 갈등 등 최신 정세 변화가 반영돼 있다. 2권에서 취급하고 있는 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그리스, 터키, 사헬, 에티오피아, 스페인, 우주다. 

특히, 2권에서는 중국이 아프리카, 중동,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 나라 및 지역 정세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1권에서는 '중국'이라는 단일 항목의 장에서 국력의 신장과 함께 해양대국을 꿈꾸는 나라로 중국을 다루고 있는 데 비해, 2권에서는 중국의 힘이 세계 각 지역 및 우주에까지 투사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만 봐도 기존 세계 질서에 변동을 주고 있는 핵심 요소가 중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1권에는 한국과 일본을 다룬 장도 있다. 저자는 이 장 서두에서 "한반도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라고 자문한 뒤 "풀 수 없다. 그냥 관리만 할 일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에는 이 문제 말고도 관심이 필요한 시급한 일들이 널려 있다"고 자답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과 한반도 밖에서 사는 사람의 시각 차이, 우선순위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저자의 자문자답이 너무 냉정한 것 같지만, 한반도 전략을 짜는 한국 정부 인사들은 그렇게 보는 것이 세계 전문가의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걸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권 서론에는 한국과 관련해 이런 대목도 나온다. 

"한국은 그 위치와 지리적 천연 장벽이 없다는 이유로 강대국들의 <경유지 역할>을 해왔다. 만약 다른 나라가 북쪽에서 침략을 해온다 해도 일단 압록강을 건넌 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이 거의 없다. 반대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한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태백산맥도 한강도 낙동강도 사람과 물자의 이동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 보이겠지만 세계인의 관점에서는 이 정도는 장애물 축에도 들지 않는 모양이다. 대륙 쪽과 해양 쪽으로부터 끊임 없이 침략을 받은 한국의 역사를 생각하면, 저자의 눈이 한반도에 사는 우리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객관화의 눈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지도자의 능력에 따라, 또는 인터넷 및 과학기술의 발전, 교통의 발달로 인해 각 나라와 지역이 예전보다 많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자만 그래도 산맥과 강, 늪, 사막 등이 쳐 놓은 지리의 조건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말한다. 직접 세계 곳곳의 분쟁 및 외교 현장을 다니며 터득한 식견이니 매우 호소력이 있다. 우리의 일상도 각자 사는 지역에 따라 활동 범위와 생활방식이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책의 원제를 '지리의 죄수들'이라고 단 것이 수긍이 간다. 

이 책이 과도한 '지리 결정론'의 시각 아래 쓰여졌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해온 것이 사실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국처럼 지정학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주변세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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