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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규 Dec 26. 2022

'미국 없는 세계'가 몰고 올 암울한 미래상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자이한

요즘 지정학에 관한 책을 많이 접하게 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가장 중요한 국제 뉴스로 떠오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의 권력 지도가 요동을 치고 있는 탓이 크다. 덩달아 지리적 위치에 따라 한 나라의 안보 및 경제가 강하게 영향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지정학도  '지정학의 귀환'이라는 말이 대중화할 만큼 각광을 받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과 한국 사람으로서는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지정학적인 변동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김앤김북스,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 옮김, 2021년 2월)은 지금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포기하고 고립주의로 돌아갈 때 나타날 수 있는 변화를 전망한 책이다. 저자는 미국이 없는 세계는 쉽게 말해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될 것이라고 본다. 각 지역별로 새로운 패자가 등장하고, 미국이 지탱해온 질서에 힘 입어 안정과 성장을 누려온 나라들이 몰락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나라들에는 지금 잘 나가는 중국과 독일도 포함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지정학 전략가이자 국제 에너지, 인구통계, 안보 전문가인 저자는 2014년과 17년에 각각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라는 비슷한 종류의 책을 내놨다. 말하자면 20년에 낸 이 책은 그의 지정학 3부작 중 최신작인 셈이다.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은 앞의 두 책의 연장선 위에 있는 책으로, 저자는 일관되게 미국이 2차대전 이후 구축한 국제질서인 브레튼우즈체제에서 손을 뗄 것이고, 아니 손을 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체제를 허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 맞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지금의 세계질서는 미국이 소련을 봉쇄하고 물리치기 위해 만든 질서라고 말한다. 미국이 소련을 제압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우군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고, 우호국들에게 그 댓가로 세계 안보를 책임지고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해상 무역과 에너지 자유로운 공급을 보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91년 소련의 멸망으로 미국이 더이상 세계 각 나라에 '뇌물'을 주며 세계질서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냉전 때 형성된 체제가 계속되는 것은 미국의 필요성에서가 아니라 관성의 힘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쳤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이어 '미국의 귀환'을 내세운 조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다시 국제협조주의가 강화될 것 같지만  미국의 고립주의 추세는 변함이 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미국이 소련 붕괴 이후에도 계속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는 바람에 중국이 이 체제를 활용해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급성장했다고 말한다. 독일의 성장도 소련의 안보 위협을 미국이 대신 막아주지 않고 경제성장에 필요한 원자재와 에너지 공급을 보장해주기 않았다면 이뤄질 수 없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국이 보장하는 국제질서가 무너지면, 즉 미국이 국제 협조주의에서 자국 우선주의로 후퇴하면 미국 주도의 질서에서 덕을 크게 본 국가들 순으로 먼저 몰락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즉, 미국 주도의 개방적인 국제질서 때문에 식량과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나라는 붕괴에 직면하고, 상대적으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독립성을 보존하면서 식량 및 에너지 자급도가 높은 나라들은 지역의 새로운 맹주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몰락 대상으로 꼽은 나라의 가장 선두에는 중국이 있고, 그 뒤로 독일, 러시아, 이란, 브라질 등이 뒤를 잇는다. 부상할 나라로는 프랑스, 터키, 아르헨티나, 일본 등을 꼽는다.

그는 미국이 없는 '무질서의 세계'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주요 요건으로 식량 및 에너지의 자립도, 내수 의존도, 젊은 인구 구성, 해군력을 들었다. 중국과 독일은 미국의 제공하는 질서 속에서 무역과 에너지 공급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온 대표적인 나라이므로 가장 먼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터키, 아르헨티나는 내수 기반이 튼튼하고 에너지 자급도 할 수 있으며, 해상을 지킬 해군력도 비교적 단단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역의 강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는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누르고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는데, 다른 나라를 분석할 때와는 다른 잣대를 사용하는 점이 눈에 띈다. 최악의 상태에 있는 일본의 취약한 인구 구조나 무역 및 에너지의 높은 해외 의존도는 경시하고 일본의 해군력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다. 심지어 일본이 2차대전 때 시도했던 대동아공영권을 넘어 아라비아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미국이 정보 공유와 군사기술 이전을 통해 일본을 이미 비공식적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낙점했다고까지 말하는데, 이것을 보면 그가 일본 신봉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예측한 대로 일본이 동아시아의 맹주가 된다면, 한국이 가장 곤란한 지경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그는 한국판 서문에서 미국이 손을 뗀 무질서의 세계에서 한국이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난관은 북한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본이 한국의 경제 번영과 안전을 보장할 유일한 나라'가 되는 셈인데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의 예측이 빗나가도록 한국 사람들이 분발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각 대륙의 주요 국가들을 다루고 있는데, 다른 지정학 책들과 달리 인도, 오스트레일리아를 별도로 다루지 않은 것이 좀 의아하다. 인도는 인구, 경제력, 지역 구도에서 조만간 중국을 가장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는 나라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꼽고 있는 나라인데, 인도를 빼놓은 것은 고개를 젓게 만든다. 석탄, 철 등의 자원 강국인 오스트레일리아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미국이 냉전 시절에 구축해놓은 세계질서에서 손을 뗄 때 나타날 수 있는 디스토피아, 아마겟돈의 상황를 예측하고 있지만 너무 미국 중심의 시각으로만 서술하고 있는 게 약점이다. 쉽게 말해 '미국판 국뽕'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세계질서의 수호자로서 미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는 점은 미국의 국력이 떨어진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인데, 마치 미국이 선심을 쓰고 있기 때문에 후퇴가 늦어진 것처럼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미국이 지금의 질서에서 빠져나갔을 때의 혼란상만 말하고 미국이 빠진 뒤 그 공백을 채우거나 조정하는 새로운 질서 형성의 가능성은 애써 외면하거나 어둡게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미국이 세계질서의 주도자 역할을 포기할 때 세계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관해 하나의 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긴 어렵다. 지정학적 변화에 가장 민감한 나라일수밖에 없는 한국으로서는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에도 충분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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